계룡산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산신(山神)에게 올리는 제사. 통일신라시대부터 국제(國祭)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 중 소사(小祀)로 거행되었다. 지금은 매년 4월에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된 형태로 산신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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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산신(山神)에게 올리는 제사. 통일신라시대부터 국제(國祭)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 중 소사(小祀)로 거행되었다. 지금은 매년 4월에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된 형태로 산신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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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경
정의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산신(山神)에게 올리는 제사. 통일신라시대부터 국제(國祭)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 중 소사(小祀)로 거행되었다. 지금은 매년 4월에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된 형태로 산신제를 올린다.
정의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산신(山神)에게 올리는 제사. 통일신라시대부터 국제(國祭)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 중 소사(小祀)로 거행되었다. 지금은 매년 4월에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된 형태로 산신제를 올린다.
내용계룡산은 대전광역시와 충남의 논산시, 계룡시, 공주시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이에 대한 믿음은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으로 구분된다. 국가에서는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치제의 일환으로 산신제를 거행했다. 특히 조선의 국가 [사전](/topic/사전)에서는 소사로 규정되어 국행 산신제를 베풀었다. 산신제는 계룡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신원사의 경내에 남아 있는 중악단에서 치러졌다.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의 동쪽 뒤편에 있는 구릉지에 위치한다. [대문](/topic/대문)간채·[중문](/topic/중문)간채·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둘레에는 네모난 [담장](/topic/담장)을 둘렀다. 중앙에 위치한 중악단은 현재 전면 세 칸과 측면 두 칸의 단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것이지만 왕실 주도로 건축되어 조선 후기의 궁전 건축 양식 및 수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단묘 건축물로서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소규모임에도 화려하고 위엄 있게 조성된 당시의 빼어난 건축물로 꼽힌다. 이것은 1999년 3월 2일 ‘보물 제1293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중앙에는 단을 설치하여 [감실](/topic/감실)을 두고 ‘계룡산산신(鷄龍山山神)’이라 쓴 [위패](/topic/위패)와 산신도(山神圖)를 [봉안](/topic/봉안)했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된 것은 1394년(태조3)부터이다. 북쪽 [묘향산](/topic/묘향산)의 상악, 남쪽 지리산의 하악과 함께 예부터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삼악(三嶽)의 하나인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651년(효종 2)에는 이 단이 폐지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명성황후의 명으로 재건하고 중악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계룡산 인근 지역에서 전승되는 산신제에 대한 연원은 조선 태조와 관계가 깊다. 태조가 조선을 일으키기 전에 계룡산을 비롯한 전국의 오악을 돌면서 기도를 했으며, 나중에 계룡산의 도움을 받았다 하여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는 설화가 있다. [무학대사](/topic/무학대사)의 현몽으로 태조가 이곳에 단(壇)을 베풀고 산제를 모셨다는 설화도 전한다. 또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살고 있는 신모(神母)가 해몽으로 태조의 건국을 예언했다 하여 신모를 위하여 [사당](/topic/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또한 태조에게 계룡산은 정씨(鄭氏) 터이고 이씨(李氏) 터가 아니라고 가르쳐 주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떡장수 할머니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중에 이 떡장수 할머니가 계룡산신임을 알고 계룡산신사를 짓고 그녀를 위해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지역 주민들은 계룡산산신제가 조선 건국 전후의 태조 [이성계](/topic/이성계)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 2년 기록에는 계룡산을 호국백(護國伯)으로 봉(封)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계룡산과 태조를 강하게 결부시키는 설화의 관념에는 계룡산산신도 조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산신에 대한 믿음이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별개로 존재했기에 계룡산의 형상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중악단에 모셔진 계룡산산신은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할아버지 형상이다. 붉은색의 [도포](/topic/도포)를 입고, 머리는 위로 틀어올린 형상의 그림이다. 조선의 국가 이념인 유교의 가부장(家父長)에 대한 관념이 강조되면서 산신을 남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앞의 설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신모나 할머니 형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계룡산 남쪽에 위치한 동학사의 산신각에 여산신령 조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산신각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절이 724년에 창건된 사실에 미루어 산신에 대한 관심도 일찍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계룡산의 산신은 여성이라는 관념이 지역 사회에서는 지배적이다.

계룡산산신제는 1998년에 복원되면서 해마다 4월에 공주시와 신원사가 공동으로 주관해 거행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국행제는 봄과 가을에 거행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대에는 “매년 춘추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사는 소재관이 담당하며, 향과 축은 중앙에서 내려보냈다. 간혹 중앙에서 내시(또는 내시별감), 정랑(육조의 정5품 관직) 등이 [제관](/topic/제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성종 대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를 귀후소(歸厚書, 관곽을 제조하고 장례를 담당했던 관청)에 넘겨 관곽(棺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목을 구입하도록 했다. 계룡산 제사에 들어간 제수의 규모도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사 내용은 조선 후기에 공주의 한 유학자가 쓴 『계룡당기(鷄龍堂記)』에서 약간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제사는 매년 춘(春) 2월과 추(秋) 8월에 택일하여 지냈고, 정초에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제사는 제관 두 명, 집사를 맡은 유생 여섯 명이 중심이 되어 행하였다. 제관은 경사(京師)에서 보냈다. 이 글에서는 ‘통훈대부 모(通訓大夫 某)’라고 되어 있다. ‘통훈대부’는 문관의 정3품 당하관이다. 유생은 읍내 향교에서 선임하였다. 계룡산 제사를 위하여 행정적으로는 경사의 [예조](/topic/예조), 공주감영, 공주목, 향교 등의 협조가 있었다.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제관과 유생은 먼저 신원사에 모였다. 이때 신원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유학자의 글에서 분명하지 않다. 폐백과 제물도 신원사에서 담당한 것 같지가 않다. 수승(首僧)을 비롯한 승려들은 제관을 모시고 제사 과정에서 연락 등 수발을 든 것으로 보인다. 폐백과 제물이 도착하면 제관과 집사들은 계룡당으로 장소를 옮겨 제사를 모셨다. 동민들도 신원사에 와서 횃불을 드는 등 제사를 주변에서 도왔다. 절에서 모시는 산신이므로 명태 같은 육식이나 술은 올리지 않는다.

역사 문헌에는 개인적인 치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밖에 개인적으로 영험한 명산인 계룡산에 제사를 올리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 수 없지만, 계룡산은 고대 사회 이래로 기도의 장(場)으로서 줄곧 활용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흉서(凶書) 죄인 곽처웅(郭處雄)이란 사람이 개인적으로 역모의 성공을 계룡산 산신에게 기도한 사건이 있다.

계룡산 인근 [마을](/topic/마을) 중에는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와 하신리에 각기 산신당이 있다. 산신당에는 산신을 무신도 형태로 봉안해 두었다. 계룡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구룡사](/topic/구룡사)라는 사찰이 있던 상신리 마을 어귀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다. 이 솟대의 머리가 계룡산을 향하도록 한다. 명산인 계룡산을 바라봄으로써 그 정기(精氣)를 받아 마을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한다. 이처럼 계룡산과 계룡산 산신에 대한 믿음은 그 주변 마을들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악단에서의 산신제는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98년에 공주시가 주도하여 산신제를 지방축제로 복원하였다. 해마다 4월 말일부터 5월 초 이틀에 걸쳐 축제를 연다. 이때 산신제는 유교식, 무속식, 불교식을 모두 포함하는 형태이다. 여러 종교 단체의 산신제가 종합되면서 본래 목적과는 달리 지방축제가 된 것이다.

제사는 먼저 공주향교에서 유가식(儒家式)으로 산천 제의를 올린 뒤 불가식(佛家式) 산신대제를 봉행하고, 공주무속연합의 법사들이 산신제와는 별도로 굿[마당](/topic/마당)을 펼친다. 이어서 외국 산악신앙의 기원제를 올리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의 지역 산신제를 진행한다. 부대 행사로 부적 그리기, 사주 보기, 타로점 등을 비롯하여 [민화](/topic/민화)·무속화 전시, 풍장놀이, 기(氣) 수련, 전통무예 시범공연 등이 열린다.

계룡산산신제는 부대행사와 더불어 봄꽃놀이 관광객과 다양한 신앙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참고문헌중악단 (이필영, 계룡산산신제, 1993)
계룡산의 신앙민속 (충청남도, 계룡산지, 1994)
공주지방의 민속신앙 (공주문화원, 1995)
공주시지-신앙 (이필영, 공주시, 2007)
내용계룡산은 대전광역시와 충남의 논산시, 계룡시, 공주시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이에 대한 믿음은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으로 구분된다. 국가에서는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치제의 일환으로 산신제를 거행했다. 특히 조선의 국가 [사전](/topic/사전)에서는 소사로 규정되어 국행 산신제를 베풀었다. 산신제는 계룡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신원사의 경내에 남아 있는 중악단에서 치러졌다.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의 동쪽 뒤편에 있는 구릉지에 위치한다. [대문](/topic/대문)간채·[중문](/topic/중문)간채·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둘레에는 네모난 [담장](/topic/담장)을 둘렀다. 중앙에 위치한 중악단은 현재 전면 세 칸과 측면 두 칸의 단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것이지만 왕실 주도로 건축되어 조선 후기의 궁전 건축 양식 및 수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단묘 건축물로서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소규모임에도 화려하고 위엄 있게 조성된 당시의 빼어난 건축물로 꼽힌다. 이것은 1999년 3월 2일 ‘보물 제1293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중앙에는 단을 설치하여 [감실](/topic/감실)을 두고 ‘계룡산산신(鷄龍山山神)’이라 쓴 [위패](/topic/위패)와 산신도(山神圖)를 [봉안](/topic/봉안)했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된 것은 1394년(태조3)부터이다. 북쪽 [묘향산](/topic/묘향산)의 상악, 남쪽 지리산의 하악과 함께 예부터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삼악(三嶽)의 하나인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651년(효종 2)에는 이 단이 폐지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명성황후의 명으로 재건하고 중악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계룡산 인근 지역에서 전승되는 산신제에 대한 연원은 조선 태조와 관계가 깊다. 태조가 조선을 일으키기 전에 계룡산을 비롯한 전국의 오악을 돌면서 기도를 했으며, 나중에 계룡산의 도움을 받았다 하여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는 설화가 있다. [무학대사](/topic/무학대사)의 현몽으로 태조가 이곳에 단(壇)을 베풀고 산제를 모셨다는 설화도 전한다. 또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살고 있는 신모(神母)가 해몽으로 태조의 건국을 예언했다 하여 신모를 위하여 [사당](/topic/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또한 태조에게 계룡산은 정씨(鄭氏) 터이고 이씨(李氏) 터가 아니라고 가르쳐 주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떡장수 할머니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중에 이 떡장수 할머니가 계룡산신임을 알고 계룡산신사를 짓고 그녀를 위해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지역 주민들은 계룡산산신제가 조선 건국 전후의 태조 [이성계](/topic/이성계)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 2년 기록에는 계룡산을 호국백(護國伯)으로 봉(封)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계룡산과 태조를 강하게 결부시키는 설화의 관념에는 계룡산산신도 조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산신에 대한 믿음이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별개로 존재했기에 계룡산의 형상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중악단에 모셔진 계룡산산신은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할아버지 형상이다. 붉은색의 [도포](/topic/도포)를 입고, 머리는 위로 틀어올린 형상의 그림이다. 조선의 국가 이념인 유교의 가부장(家父長)에 대한 관념이 강조되면서 산신을 남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앞의 설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신모나 할머니 형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계룡산 남쪽에 위치한 동학사의 산신각에 여산신령 조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산신각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절이 724년에 창건된 사실에 미루어 산신에 대한 관심도 일찍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계룡산의 산신은 여성이라는 관념이 지역 사회에서는 지배적이다.

계룡산산신제는 1998년에 복원되면서 해마다 4월에 공주시와 신원사가 공동으로 주관해 거행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국행제는 봄과 가을에 거행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대에는 “매년 춘추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사는 소재관이 담당하며, 향과 축은 중앙에서 내려보냈다. 간혹 중앙에서 내시(또는 내시별감), 정랑(육조의 정5품 관직) 등이 [제관](/topic/제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성종 대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를 귀후소(歸厚書, 관곽을 제조하고 장례를 담당했던 관청)에 넘겨 관곽(棺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목을 구입하도록 했다. 계룡산 제사에 들어간 제수의 규모도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사 내용은 조선 후기에 공주의 한 유학자가 쓴 『계룡당기(鷄龍堂記)』에서 약간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제사는 매년 춘(春) 2월과 추(秋) 8월에 택일하여 지냈고, 정초에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제사는 제관 두 명, 집사를 맡은 유생 여섯 명이 중심이 되어 행하였다. 제관은 경사(京師)에서 보냈다. 이 글에서는 ‘통훈대부 모(通訓大夫 某)’라고 되어 있다. ‘통훈대부’는 문관의 정3품 당하관이다. 유생은 읍내 향교에서 선임하였다. 계룡산 제사를 위하여 행정적으로는 경사의 [예조](/topic/예조), 공주감영, 공주목, 향교 등의 협조가 있었다.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제관과 유생은 먼저 신원사에 모였다. 이때 신원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유학자의 글에서 분명하지 않다. 폐백과 제물도 신원사에서 담당한 것 같지가 않다. 수승(首僧)을 비롯한 승려들은 제관을 모시고 제사 과정에서 연락 등 수발을 든 것으로 보인다. 폐백과 제물이 도착하면 제관과 집사들은 계룡당으로 장소를 옮겨 제사를 모셨다. 동민들도 신원사에 와서 횃불을 드는 등 제사를 주변에서 도왔다. 절에서 모시는 산신이므로 명태 같은 육식이나 술은 올리지 않는다.

역사 문헌에는 개인적인 치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밖에 개인적으로 영험한 명산인 계룡산에 제사를 올리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 수 없지만, 계룡산은 고대 사회 이래로 기도의 장(場)으로서 줄곧 활용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흉서(凶書) 죄인 곽처웅(郭處雄)이란 사람이 개인적으로 역모의 성공을 계룡산 산신에게 기도한 사건이 있다.

계룡산 인근 [마을](/topic/마을) 중에는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와 하신리에 각기 산신당이 있다. 산신당에는 산신을 무신도 형태로 봉안해 두었다. 계룡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구룡사](/topic/구룡사)라는 사찰이 있던 상신리 마을 어귀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다. 이 솟대의 머리가 계룡산을 향하도록 한다. 명산인 계룡산을 바라봄으로써 그 정기(精氣)를 받아 마을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한다. 이처럼 계룡산과 계룡산 산신에 대한 믿음은 그 주변 마을들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악단에서의 산신제는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98년에 공주시가 주도하여 산신제를 지방축제로 복원하였다. 해마다 4월 말일부터 5월 초 이틀에 걸쳐 축제를 연다. 이때 산신제는 유교식, 무속식, 불교식을 모두 포함하는 형태이다. 여러 종교 단체의 산신제가 종합되면서 본래 목적과는 달리 지방축제가 된 것이다.

제사는 먼저 공주향교에서 유가식(儒家式)으로 산천 제의를 올린 뒤 불가식(佛家式) 산신대제를 봉행하고, 공주무속연합의 법사들이 산신제와는 별도로 굿[마당](/topic/마당)을 펼친다. 이어서 외국 산악신앙의 기원제를 올리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의 지역 산신제를 진행한다. 부대 행사로 부적 그리기, 사주 보기, 타로점 등을 비롯하여 [민화](/topic/민화)·무속화 전시, 풍장놀이, 기(氣) 수련, 전통무예 시범공연 등이 열린다.

계룡산산신제는 부대행사와 더불어 봄꽃놀이 관광객과 다양한 신앙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참고문헌중악단 (이필영, 계룡산산신제, 1993)
계룡산의 신앙민속 (충청남도, 계룡산지, 1994)
공주지방의 민속신앙 (공주문화원, 1995)
공주시지-신앙 (이필영, 공주시, 2007)
역사계룡산은 호서(湖西)지방의 명산으로, 백제시대 때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명산으로 지목받았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언제부터 지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백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간주되었기에 연원은 오래되었다.

백제에서는 나라의 동쪽 경계를 수호하는 산으로서 계람산(鷄藍山)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에는 전 국토를 수호하는 명산대천의 제사 중 중사(中祀)인 오악(五嶽)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악(西嶽)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중사로 치제되었으며, 명칭만 남악(南嶽)으로 바뀌었다. 조선에 이르러 오악이 삼산(三山)으로 축소되면서 [묘향산](/topic/묘향산)·계룡산·지리산이 국토를 수호하는 산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계룡산은 일찍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명산으로 인식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되었다. 이 산은 지역을 수호하는 명산이라기보다 국토를 수호하는 국행제의 성소(聖所)로 간주되었다.

계룡산산신제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는 조선시대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계룡산은 조선시대의 국가 [사전](/topic/사전)(祀典) 중 소사(小祀)의 대상이었다. 계룡산은 국가를 수호하는 삼악(三嶽)신앙 중 한 곳으로, 나라의 중앙을 지키는 곳이라 하여 이곳에 중악단(中嶽壇)을 건립했다. 현재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소재한다. 신원사(新元寺) 경내에 있는 중악단은 사찰 경내에 있지만 사찰과는 별도인 국행제의 처소이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가 향축(香祝)을 받들고 내려와 계룡산 산신에게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국가 사전이 폐지되면서 방치되었다가 1998년에 공주시가 복원하여 지금까지 해마다 4월에 ‘계룡산산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현행 제사는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되어있다

이 밖에 계룡산 주변 [마을](/topic/마을)에서도 마을의 주신(主神)으로 계룡산 산신을 모신다. 계룡산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계룡산은 명산으로서 자신의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계룡산은 호서(湖西)지방의 명산으로, 백제시대 때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명산으로 지목받았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언제부터 지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백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간주되었기에 연원은 오래되었다.

백제에서는 나라의 동쪽 경계를 수호하는 산으로서 계람산(鷄藍山)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에는 전 국토를 수호하는 명산대천의 제사 중 중사(中祀)인 오악(五嶽)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악(西嶽)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중사로 치제되었으며, 명칭만 남악(南嶽)으로 바뀌었다. 조선에 이르러 오악이 삼산(三山)으로 축소되면서 [묘향산](/topic/묘향산)·계룡산·지리산이 국토를 수호하는 산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계룡산은 일찍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명산으로 인식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되었다. 이 산은 지역을 수호하는 명산이라기보다 국토를 수호하는 국행제의 성소(聖所)로 간주되었다.

계룡산산신제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는 조선시대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계룡산은 조선시대의 국가 [사전](/topic/사전)(祀典) 중 소사(小祀)의 대상이었다. 계룡산은 국가를 수호하는 삼악(三嶽)신앙 중 한 곳으로, 나라의 중앙을 지키는 곳이라 하여 이곳에 중악단(中嶽壇)을 건립했다. 현재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소재한다. 신원사(新元寺) 경내에 있는 중악단은 사찰 경내에 있지만 사찰과는 별도인 국행제의 처소이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가 향축(香祝)을 받들고 내려와 계룡산 산신에게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국가 사전이 폐지되면서 방치되었다가 1998년에 공주시가 복원하여 지금까지 해마다 4월에 ‘계룡산산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현행 제사는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되어있다

이 밖에 계룡산 주변 [마을](/topic/마을)에서도 마을의 주신(主神)으로 계룡산 산신을 모신다. 계룡산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계룡산은 명산으로서 자신의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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