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기

한국무속신앙사전
농기
농기는 [마을](/topic/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 지역에 따라 농상기·대기(大旗)·[덕석](/topic/덕석)기·용(龍)[당기](/topic/당기)·[용기](/topic/용기)(龍旗)·[서낭기](/topic/서낭기) 등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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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는 [마을](/topic/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 지역에 따라 농상기·대기(大旗)·[덕석](/topic/덕석)기·용(龍)[당기](/topic/당기)·[용기](/topic/용기)(龍旗)·[서낭기](/topic/서낭기) 등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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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농기는 [마을](/topic/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 지역에 따라 농상기·대기(大旗)·[덕석](/topic/덕석)기·용(龍)[당기](/topic/당기)·[용기](/topic/용기)(龍旗)·[서낭기](/topic/서낭기) 등으로 불린다.
정의농기는 [마을](/topic/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 지역에 따라 농상기·대기(大旗)·[덕석](/topic/덕석)기·용(龍)[당기](/topic/당기)·[용기](/topic/용기)(龍旗)·[서낭기](/topic/서낭기) 등으로 불린다.
내용농기는 일정하게 신이 깃든 대, 즉 [신대](/topic/신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당산굿](/topic/당산굿)을 칠 때는 으레 농기가 신을 받았다.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마을](/topic/마을) 어귀에 농기를 세워 놓는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농기의 영적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농기는 마을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풍물을 칠 때는 언제나 농기가 앞장섰다. [두레](/topic/두레)싸움이 벌어지면 마을 간에 농기를 뺏으려고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기도 했다.

농기와 같이 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수직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들로는 신단수 이래의 신목·솟대·서낭대·농기 등이 있다. 엘리아데(M. Eliade)가 지적한 대로 수목신앙의 원초적 형태는 살아 있는 나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가지](/topic/가지)와 잎이 제거된 나무[기둥](/topic/기둥)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나뭇잎의 변화성을 제거함으로써 불변성을 획득하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솟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수직재이다. 솟대는 살아 있는 나무에서 잎과 가지를 제거한 나무, 즉 생명체로서는 수명을 다했지만 주술종교적으로 생명을 새롭게 부여받은 나무인 것이다. 서낭대 역시 살아 있는 자연의 나무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주술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죽은 나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다만 서낭대는 이동이 가능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선후관계를 따져보면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의 서낭대가 솟대처럼 고정된 신간의 후신이다. 또 주실은 물론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topic/하회마을)의 서낭대에 달린 당방울이 솟대에 달린 방울의 잔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정된 신간에서 이동형 신간으로의 변화가 이동걸립(移動乞粒)과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걸립패](/topic/걸립패)의 신기(神旗, 서낭대 포함)와 [두레패](/topic/두레패)의 농기 둘 다 장목과 방울, 그리고 천으로 된 장식이 나타나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보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농기는 상대적으로 제의성이 약화된 것이다.

서낭대와 농기는 대체로 장목과 방울을 달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천으로 된 장식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경북 내륙의 서낭대는 안동의 하회나 가송리에서 볼 수 있듯이 옷가지나 천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주민들이 신에게 바친 공물이다. 경남 창녕군 일대의 서낭대는 이와 달리 대나무로 된 몸체에 [광목](/topic/광목)을 둘렀으며, 지역민들이 바친천을 상부에 주렁주렁 매단 뒤에 중단부에 여러 개의 헝겊을 연결한 깃발을 매달았으며, 깃발에는 특별한 그림이 없다. 전라도 지역 농기의 깃발은 깃대의 상단에 달려 있으며, 몸체를 광목으로 감거나 주민들이 바친 천이나 옷가지를 매달지는 않는다.

서낭대와 농기는 깃발이 없는 것이 가장 오래된 형태이고, 공물로 바친 천이 결합된 형태가 그다음의 것이며, 깃발만 있는 형태가 가장 나중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솟대와 문헌상의 소도에 천으로 된 장식물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점차 공물로 바쳐진 천을 장식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두레노동이 활성화하고 풍물이 군사희적(軍事戱的) 성격을 수렴하면서 깃발만 있는 쪽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깃발만 있는 쪽으로 갈수록 주술종교적 성격이 약화되고 유희성이 증가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종합하면, 오늘날 사용되는 농기는 살아 있는 나무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솟대와 소도 등의 신간으로 변화하고, 서낭대의 발전에 발맞추어 군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서낭대와 농기를 이용한 대동놀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서낭대싸움](/topic/서낭대싸움)이다. 이 서낭대싸움은 경북 청도군과 경남의 창녕군 지역에서 산견된다. 청도군 차산리의 경우를 살펴보면,매년 정초에 동제를 마친 각 마을의 풍물패들이 ‘처낭대(서낭대)’를 앞세우고 풍각면 소재지로 모여든다. 이때 마주치는 풍물패들은 상대편 마을에서 먼저 처낭대를 숙여 자기 마을의 처낭대에 인사하지 않으면 ‘처낭싸움’을 시작한다. 양편의 처낭대를 마주 건 뒤에 밀어붙여서 상대편의 처낭대가 부러지거나 먼저 땅에 닿으면 진다. 진 편의 처낭은 당연히 이긴 마을의 처낭에게 절을 해야 한다. 한편 창녕군 영산면의 경우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동부와 서부로 편을 갈라서 줄당기기나 쇠머리대기를 하기 전에 서낭대싸움을 벌인다. 양편은 각 편에서 가장 강하다고 인정된 서낭대를 들고 나와서 싸움을 벌인다. 싸움의 방식은 청도군과 마찬가지이다. 이들 지역의 서낭대싸움은 서낭대끼리의 싸움과 약한마을이 강한 마을에 굽혀 절하기라는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농기를 이용한 대동놀이로서는 [기세배](/topic/기세배) 또는 [기싸움](/topic/기싸움)이 있다. 이때 사용하는 농기는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당 마을의 동신이 좌정한 것으로 인식된다. 기세배는 두레가 발달한 지역인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농기는 당산굿이나 장승제에서 서낭의 하강처와 상징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두레의 상징으로 더 빈번히 사용되었다. 두레를 결성한 마을에서 가장 먼저 화려하게 농기를 만들고, 농기를 중심으로 두레패가 모이고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기는노동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부여군 저석리 산신제에서 사용하는 농기는 두레패의 농기뿐만 아니라 읍에서 주최하는 행사 때에는 마을을 대표하는 마을기로도 쓰인다.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별로 농기싸움이있을 때에는 이 농기로 기싸움을 하는데, 저석3리 두레패는 어느 마을에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마을에서 저석리로 기세배를 드리러 오곤 하였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의 기세배를 보면, 농기의 제작 연대와 풍물패의 창립 연대 등을 감안하여 맏형이 되는 선상동(先上洞)과 둘째 형이 되는 부상동(副上洞), 막내인 막내동 등을 미리 정한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선상동에 모여 차례대로 ‘아우기’가 ‘형님기’에게 세배를 한다. 이때 세배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순위에 불만이 있으면 서로 기싸움을 벌인다. 익산 함열의 기싸움은 기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풍물패 간의 싸움으로 기는 탈취와 훼손의 대상일 따름이다. 우세한 편이 상대편의 농기를 빼앗아 부러뜨리고 기를 찢어버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하고 형님기가 된다. 이러한 양상은 전북 완주군 봉동의 기세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세배는 앞에서 살펴본 서낭대싸움과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준다. 둘 다 싸움과 절하기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 내용과 양식화의 정도에 따라서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선싸움의 방식을 살펴보면 서낭대싸움은 서낭대를 도구로 한 싸움인 데 반해 기세배 또는 기싸움은 농기를 도구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농기를 앞세운 풍물패 간의 싸움이다. 다음으로 양식화의 정도를 살펴보면 기세배의 세배가 정례적이고 약식화한 데 비해서 서낭대싸움은 영산을 제외하고는 서낭대 간의 절이 임의적이고 덜 양식화한 것임을 알수 있다.
참고문헌한국민속대관-종교 (민간신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한국의 [두레](/topic/두레) (주강현, 집문당, 1997)
한국 민간신앙의 실체와 전승 (김종대, 민속원, 1999)
문경 모산굴 [기세배](/topic/기세배) ([문경새재](/topic/문경새재)박물관, 문경시, 1999)
부여 저석리 산신제 (임동권, 부여문화원, 2007)
[농민](/topic/농민)의 자부심 (농기, 농협중앙회 [농업](/topic/농업)박물관·농[협문](/topic/협문)화복지재단, 2009)
내용농기는 일정하게 신이 깃든 대, 즉 [신대](/topic/신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당산굿](/topic/당산굿)을 칠 때는 으레 농기가 신을 받았다.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마을](/topic/마을) 어귀에 농기를 세워 놓는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농기의 영적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농기는 마을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풍물을 칠 때는 언제나 농기가 앞장섰다. [두레](/topic/두레)싸움이 벌어지면 마을 간에 농기를 뺏으려고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기도 했다.

농기와 같이 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수직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들로는 신단수 이래의 신목·솟대·서낭대·농기 등이 있다. 엘리아데(M. Eliade)가 지적한 대로 수목신앙의 원초적 형태는 살아 있는 나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가지](/topic/가지)와 잎이 제거된 나무[기둥](/topic/기둥)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나뭇잎의 변화성을 제거함으로써 불변성을 획득하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솟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수직재이다. 솟대는 살아 있는 나무에서 잎과 가지를 제거한 나무, 즉 생명체로서는 수명을 다했지만 주술종교적으로 생명을 새롭게 부여받은 나무인 것이다. 서낭대 역시 살아 있는 자연의 나무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주술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죽은 나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다만 서낭대는 이동이 가능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선후관계를 따져보면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의 서낭대가 솟대처럼 고정된 신간의 후신이다. 또 주실은 물론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topic/하회마을)의 서낭대에 달린 당방울이 솟대에 달린 방울의 잔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정된 신간에서 이동형 신간으로의 변화가 이동걸립(移動乞粒)과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걸립패](/topic/걸립패)의 신기(神旗, 서낭대 포함)와 [두레패](/topic/두레패)의 농기 둘 다 장목과 방울, 그리고 천으로 된 장식이 나타나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보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농기는 상대적으로 제의성이 약화된 것이다.

서낭대와 농기는 대체로 장목과 방울을 달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천으로 된 장식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경북 내륙의 서낭대는 안동의 하회나 가송리에서 볼 수 있듯이 옷가지나 천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주민들이 신에게 바친 공물이다. 경남 창녕군 일대의 서낭대는 이와 달리 대나무로 된 몸체에 [광목](/topic/광목)을 둘렀으며, 지역민들이 바친천을 상부에 주렁주렁 매단 뒤에 중단부에 여러 개의 헝겊을 연결한 깃발을 매달았으며, 깃발에는 특별한 그림이 없다. 전라도 지역 농기의 깃발은 깃대의 상단에 달려 있으며, 몸체를 광목으로 감거나 주민들이 바친 천이나 옷가지를 매달지는 않는다.

서낭대와 농기는 깃발이 없는 것이 가장 오래된 형태이고, 공물로 바친 천이 결합된 형태가 그다음의 것이며, 깃발만 있는 형태가 가장 나중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솟대와 문헌상의 소도에 천으로 된 장식물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점차 공물로 바쳐진 천을 장식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두레노동이 활성화하고 풍물이 군사희적(軍事戱的) 성격을 수렴하면서 깃발만 있는 쪽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깃발만 있는 쪽으로 갈수록 주술종교적 성격이 약화되고 유희성이 증가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종합하면, 오늘날 사용되는 농기는 살아 있는 나무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솟대와 소도 등의 신간으로 변화하고, 서낭대의 발전에 발맞추어 군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서낭대와 농기를 이용한 대동놀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서낭대싸움](/topic/서낭대싸움)이다. 이 서낭대싸움은 경북 청도군과 경남의 창녕군 지역에서 산견된다. 청도군 차산리의 경우를 살펴보면,매년 정초에 동제를 마친 각 마을의 풍물패들이 ‘처낭대(서낭대)’를 앞세우고 풍각면 소재지로 모여든다. 이때 마주치는 풍물패들은 상대편 마을에서 먼저 처낭대를 숙여 자기 마을의 처낭대에 인사하지 않으면 ‘처낭싸움’을 시작한다. 양편의 처낭대를 마주 건 뒤에 밀어붙여서 상대편의 처낭대가 부러지거나 먼저 땅에 닿으면 진다. 진 편의 처낭은 당연히 이긴 마을의 처낭에게 절을 해야 한다. 한편 창녕군 영산면의 경우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동부와 서부로 편을 갈라서 줄당기기나 쇠머리대기를 하기 전에 서낭대싸움을 벌인다. 양편은 각 편에서 가장 강하다고 인정된 서낭대를 들고 나와서 싸움을 벌인다. 싸움의 방식은 청도군과 마찬가지이다. 이들 지역의 서낭대싸움은 서낭대끼리의 싸움과 약한마을이 강한 마을에 굽혀 절하기라는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농기를 이용한 대동놀이로서는 [기세배](/topic/기세배) 또는 [기싸움](/topic/기싸움)이 있다. 이때 사용하는 농기는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당 마을의 동신이 좌정한 것으로 인식된다. 기세배는 두레가 발달한 지역인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농기는 당산굿이나 장승제에서 서낭의 하강처와 상징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두레의 상징으로 더 빈번히 사용되었다. 두레를 결성한 마을에서 가장 먼저 화려하게 농기를 만들고, 농기를 중심으로 두레패가 모이고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기는노동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부여군 저석리 산신제에서 사용하는 농기는 두레패의 농기뿐만 아니라 읍에서 주최하는 행사 때에는 마을을 대표하는 마을기로도 쓰인다.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별로 농기싸움이있을 때에는 이 농기로 기싸움을 하는데, 저석3리 두레패는 어느 마을에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마을에서 저석리로 기세배를 드리러 오곤 하였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의 기세배를 보면, 농기의 제작 연대와 풍물패의 창립 연대 등을 감안하여 맏형이 되는 선상동(先上洞)과 둘째 형이 되는 부상동(副上洞), 막내인 막내동 등을 미리 정한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선상동에 모여 차례대로 ‘아우기’가 ‘형님기’에게 세배를 한다. 이때 세배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순위에 불만이 있으면 서로 기싸움을 벌인다. 익산 함열의 기싸움은 기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풍물패 간의 싸움으로 기는 탈취와 훼손의 대상일 따름이다. 우세한 편이 상대편의 농기를 빼앗아 부러뜨리고 기를 찢어버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하고 형님기가 된다. 이러한 양상은 전북 완주군 봉동의 기세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세배는 앞에서 살펴본 서낭대싸움과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준다. 둘 다 싸움과 절하기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 내용과 양식화의 정도에 따라서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선싸움의 방식을 살펴보면 서낭대싸움은 서낭대를 도구로 한 싸움인 데 반해 기세배 또는 기싸움은 농기를 도구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농기를 앞세운 풍물패 간의 싸움이다. 다음으로 양식화의 정도를 살펴보면 기세배의 세배가 정례적이고 약식화한 데 비해서 서낭대싸움은 영산을 제외하고는 서낭대 간의 절이 임의적이고 덜 양식화한 것임을 알수 있다.
참고문헌한국민속대관-종교 (민간신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한국의 [두레](/topic/두레) (주강현, 집문당, 1997)
한국 민간신앙의 실체와 전승 (김종대, 민속원, 1999)
문경 모산굴 [기세배](/topic/기세배) ([문경새재](/topic/문경새재)박물관, 문경시, 1999)
부여 저석리 산신제 (임동권, 부여문화원, 2007)
[농민](/topic/농민)의 자부심 (농기, 농협중앙회 [농업](/topic/농업)박물관·농[협문](/topic/협문)화복지재단, 2009)
형태농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조선 후기의 농기는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가능한 크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 농기가 [마을](/topic/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로서 각 마을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농기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즉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장방형 기폭에다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topic/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글씨를 써 넣은 형태가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농기는 깃대, 장목, 기수염, 기폭, 지네발, 용꼬리, 버렛줄 등으로 구성된다. 깃대는 주로 대나무로 만들지만 지역에 따라 소나무를 사용하기도 한다. 깃대의 끝에는 장목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여러 번 칼집을 내어 갈라 놓는다. 길이는 보통 5m가 넘으며 7~8m에 달하는 것도 있다.

깃대의 꼭대기에는 장목을 다는 경우가 많다. 장목은 꿩의 꽁지깃을 모아 묶어서 만든 것으로 꿩장목 또는 꿩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꿩의 꽁지 대신 싸리나무나 갈대로 대신하기도 한다.

![마을신앙 농기](/upload/img/20170106/20170106124956_t_.jpg)

장목 바로 아래에는 농기를 위엄 있게 장식하기 위해 기수염을 달았다. 대개 총을치라 불리는 기수염을 사용했는데, 총을치는 칡을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후 드러난 하얀 속살을 가늘게 찢어서 붉게 [염색](/topic/염색)한 것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서 총을치를 대신해 흰수건이나 [창호지](/topic/창호지)를 가늘게 찢어서 매달기도 했다. 한편 깃대에는 농기를 세워 놓을 때 사용하는세 가닥의 긴 줄이 달려 있는데, 이를 버렛줄(벌이줄)이라고 한다. 농기를 세울 장소가 정해지면 주변에 말뚝을 박아 놓고 이 말뚝에 버렛줄을 묶어서 농기가 쓰러지지 않도록균형을 잡는다.

기폭은 크게 두 [가지](/topic/가지) 형식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긴 형식이며 다른 하나는 좌에서 우로 긴 형식이다. 더러는 정사각형 형태도 있다. 기폭의 둘레에는 검은색과 파란색, 붉은색 등의 천을 잘라 붙여 너풀거리도록 장식하는데, 이를 지네발이라고 한다. 용꼬리는 기폭의 끝에 0.5~1m 정도 길이의 천을 길게 덧댄 것을 말한다.

기폭에는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나 ‘신농유업(神農遺業)’이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대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과 구름을 그려 넣지만, 용과함께 물고기, 자라, 기마상, 신선 등을 그리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 ‘태평성대(太平聖代)’ 같은 글씨를 써넣기도 했다.

농기에는 마을명과 제작연도를 표시해 두는 경우가 많았다. 농기의 제작연도는 [[두레](/topic/두레)패](/topic/두레패)의 서열을 가리는 데 근거가 되었다. 후대로 들어오면서 농기의 권위가 약화하고 약식의 농기가 등장하면서 마을명과 제작연도가 생략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형태농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조선 후기의 농기는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가능한 크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 농기가 [마을](/topic/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로서 각 마을의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농기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즉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장방형 기폭에다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topic/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글씨를 써 넣은 형태가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농기는 깃대, 장목, 기수염, 기폭, 지네발, 용꼬리, 버렛줄 등으로 구성된다. 깃대는 주로 대나무로 만들지만 지역에 따라 소나무를 사용하기도 한다. 깃대의 끝에는 장목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여러 번 칼집을 내어 갈라 놓는다. 길이는 보통 5m가 넘으며 7~8m에 달하는 것도 있다.

깃대의 꼭대기에는 장목을 다는 경우가 많다. 장목은 꿩의 꽁지깃을 모아 묶어서 만든 것으로 꿩장목 또는 꿩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꿩의 꽁지 대신 싸리나무나 갈대로 대신하기도 한다.

![마을신앙 농기](/upload/img/20170106/20170106124956_t_.jpg)

장목 바로 아래에는 농기를 위엄 있게 장식하기 위해 기수염을 달았다. 대개 총을치라 불리는 기수염을 사용했는데, 총을치는 칡을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후 드러난 하얀 속살을 가늘게 찢어서 붉게 [염색](/topic/염색)한 것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서 총을치를 대신해 흰수건이나 [창호지](/topic/창호지)를 가늘게 찢어서 매달기도 했다. 한편 깃대에는 농기를 세워 놓을 때 사용하는세 가닥의 긴 줄이 달려 있는데, 이를 버렛줄(벌이줄)이라고 한다. 농기를 세울 장소가 정해지면 주변에 말뚝을 박아 놓고 이 말뚝에 버렛줄을 묶어서 농기가 쓰러지지 않도록균형을 잡는다.

기폭은 크게 두 [가지](/topic/가지) 형식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긴 형식이며 다른 하나는 좌에서 우로 긴 형식이다. 더러는 정사각형 형태도 있다. 기폭의 둘레에는 검은색과 파란색, 붉은색 등의 천을 잘라 붙여 너풀거리도록 장식하는데, 이를 지네발이라고 한다. 용꼬리는 기폭의 끝에 0.5~1m 정도 길이의 천을 길게 덧댄 것을 말한다.

기폭에는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나 ‘신농유업(神農遺業)’이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대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과 구름을 그려 넣지만, 용과함께 물고기, 자라, 기마상, 신선 등을 그리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 ‘태평성대(太平聖代)’ 같은 글씨를 써넣기도 했다.

농기에는 마을명과 제작연도를 표시해 두는 경우가 많았다. 농기의 제작연도는 [[두레](/topic/두레)패](/topic/두레패)의 서열을 가리는 데 근거가 되었다. 후대로 들어오면서 농기의 권위가 약화하고 약식의 농기가 등장하면서 마을명과 제작연도가 생략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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