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세동리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19세기 후반 산향계를 조직하고 운영해 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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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이해준 |
정의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세동리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19세기 후반 산향계를 조직하고 운영해 온 문서. | 정의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세동리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19세기 후반 산향계를 조직하고 운영해 온 문서. | 내용 | 세동리산향계문서는 1896년 3월의 『산향계좌목(山饗稧座目)』과 『축원문(祝願文)』, 1930년 10월의『산향계준칙부(山享稧準則簿)』, 『산향계축문급열명부(山享稧祝文及列名簿)』, 『산향계수입지출부(山享稧收入支出簿)』를 비롯해서 연도별 수입지출부와 축원명부, 부동산 등기권리증 등 40여 건이다. 산향계문서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문서는 1896년 3월 14일에 계를 창설하면서 작성한『 산향계좌목』으로 가로 18.5㎝×세로 19.5㎝ 크기의 성책 고문서이다.「 입의(立議)」,「 좌목(座目)」, 강신일의「 수계기(修契記)」 순으로 결책되어 있다.「 입의」에는 산향계의 설립 취지와 운영에 관한 12조목이 실려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식리하여 이자로 산제비용으로 사용할 것, 강신(講信)은 9월 그믐날로 정할 것, 이자는 사분(四分)으로 정할 것, 이유 없이 불참하는 자는 상벌, 고집을 부려 의결사항을 따르지 않는 자는 중벌, 산제날 늦게 오거나 출타한 자는 하벌 등으로 하고 상벌 5전, 중벌 3전, 하벌 2전의 벌전을 거두는 내용이다.「 좌목」에는 산향계 결성을 주도한 신양선(申良善)을 필두로 계원명단이 수록되어 있고,「 수계기」에는 정유년(1897)부터 계축년(1913)까지 춘추향사(春秋享祀) 비용을 포함한 경비내역과 수봉·분급 내역, 결의사항 등을 담고 있다. 『축원문』은 황제폐하(고종황제)를 비롯한 대행황후폐하(명성황후), 태자, 태자비, 제궁종실, 문무백관, 도내방백, 성주[成造]의 복을 축원하는 상축에 이어 산향계에 가입한 각 세대 및 희사금을 납부한 타동(他洞) 거주민의 소지 명단으로 신양선을 시작으로 70여명이 올라 있다. 1930년의『 산향계준칙부』는 계를 중수하면서 1896년의 「입의」를 보완한 것으로 총 23개조의 준칙을 국한문으로 적어 놓았다. 매년 가을에 지내던 산신제를 봄·가을로 두 번 시행하되 봄에는 정월 초삼일, 가을에는 시월 초삼일로 제의 일자를 완정(完定)하고 있으며, 제수비용을 충당하고 남은 돈은 토지를 매수하여 여기에서 도지[賭租]를 받아 산제당의 유지·보수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케 하고 있는 점 등이 특징이다. 『산향계수입지출부』는 1930년부터 1949년까지 산향계의 수입·지출과 관련된 각 연도별로 수봉금, 소모 내역, 분급 내역 등이 기재되어 있다.『 산향계축문급열명부』에는 「산향축문(山享祝文)」과 축원자 명단인 「열명부(列名簿)」, 「사망자 제명부(死亡者 除名簿)」 등이 수록되고, 『산향계토지대장및등기부』에는 토지대장(土地臺帳), 매도증서(賣渡證書), 관련 영수증(領收證), 특별녹고삼림양여원(特別綠故森林讓與願) 등이 결책되어 있다. 토지대장에는 산향계에서 소유한 4건의 부동산이 기재되어 있다. | 내용 | 세동리산향계문서는 1896년 3월의 『산향계좌목(山饗稧座目)』과 『축원문(祝願文)』, 1930년 10월의『산향계준칙부(山享稧準則簿)』, 『산향계축문급열명부(山享稧祝文及列名簿)』, 『산향계수입지출부(山享稧收入支出簿)』를 비롯해서 연도별 수입지출부와 축원명부, 부동산 등기권리증 등 40여 건이다. 산향계문서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문서는 1896년 3월 14일에 계를 창설하면서 작성한『 산향계좌목』으로 가로 18.5㎝×세로 19.5㎝ 크기의 성책 고문서이다.「 입의(立議)」,「 좌목(座目)」, 강신일의「 수계기(修契記)」 순으로 결책되어 있다.「 입의」에는 산향계의 설립 취지와 운영에 관한 12조목이 실려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식리하여 이자로 산제비용으로 사용할 것, 강신(講信)은 9월 그믐날로 정할 것, 이자는 사분(四分)으로 정할 것, 이유 없이 불참하는 자는 상벌, 고집을 부려 의결사항을 따르지 않는 자는 중벌, 산제날 늦게 오거나 출타한 자는 하벌 등으로 하고 상벌 5전, 중벌 3전, 하벌 2전의 벌전을 거두는 내용이다.「 좌목」에는 산향계 결성을 주도한 신양선(申良善)을 필두로 계원명단이 수록되어 있고,「 수계기」에는 정유년(1897)부터 계축년(1913)까지 춘추향사(春秋享祀) 비용을 포함한 경비내역과 수봉·분급 내역, 결의사항 등을 담고 있다. 『축원문』은 황제폐하(고종황제)를 비롯한 대행황후폐하(명성황후), 태자, 태자비, 제궁종실, 문무백관, 도내방백, 성주[成造]의 복을 축원하는 상축에 이어 산향계에 가입한 각 세대 및 희사금을 납부한 타동(他洞) 거주민의 소지 명단으로 신양선을 시작으로 70여명이 올라 있다. 1930년의『 산향계준칙부』는 계를 중수하면서 1896년의 「입의」를 보완한 것으로 총 23개조의 준칙을 국한문으로 적어 놓았다. 매년 가을에 지내던 산신제를 봄·가을로 두 번 시행하되 봄에는 정월 초삼일, 가을에는 시월 초삼일로 제의 일자를 완정(完定)하고 있으며, 제수비용을 충당하고 남은 돈은 토지를 매수하여 여기에서 도지[賭租]를 받아 산제당의 유지·보수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케 하고 있는 점 등이 특징이다. 『산향계수입지출부』는 1930년부터 1949년까지 산향계의 수입·지출과 관련된 각 연도별로 수봉금, 소모 내역, 분급 내역 등이 기재되어 있다.『 산향계축문급열명부』에는 「산향축문(山享祝文)」과 축원자 명단인 「열명부(列名簿)」, 「사망자 제명부(死亡者 除名簿)」 등이 수록되고, 『산향계토지대장및등기부』에는 토지대장(土地臺帳), 매도증서(賣渡證書), 관련 영수증(領收證), 특별녹고삼림양여원(特別綠故森林讓與願) 등이 결책되어 있다. 토지대장에는 산향계에서 소유한 4건의 부동산이 기재되어 있다. | 역사 | ‘공주세동리산향계문서’는 공주시 유구읍 세동리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19세기 후반부터 조직·운영해 온 산향계 자료이다. 산향계란 산신제의 비용을 충당하고, 산신도와 산제당 등을 유지·보수할 목적으로 조직된 [동제계](/topic/동제계)(洞祭契)의 일종이다. 세동리(細洞里)는 태화산(泰華山)을 중심으로 해발 400~600m의 높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깊은 산골로 상세동(상동), 중세동(안말), 하세동(양지뜸)의 세 [마을](/topic/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산향계는 세동리 중에서도 산제당이 위치한 상세동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현재 전하는 산향계문서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병신년(1896) 3월의 『산향계좌목(山饗稧座目)』과 「축원문(祝願文)」이다. 이해는 ‘[공주상세동산신도](/topic/공주상세동산신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9호)’의 제작 연도, 산제당의 초창 연도와도 일치한다. 즉 산제당을 짓고 인근 마곡사(麻谷寺)의 화승(畵僧)으로부터 특별히 산신도를 제작해 모셨는가 하면, 이를 잘 유지하기 위해 산향계를 조직하는 등 병신년은 세동리 산신제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이다. 세동리 산향계는 1896년에 처음 조직된 이래 1930년에 한 차례 중수되었다. 산향계의 설립과 관련해서는 『산향계좌목』 「입의(立議)」편에 “산 아래 거주하는 사람들이 봄·가을로 산신제를 지낸 뒤 계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1896년 조직된 이래 35년을 이어오던 산향계는 1930년에 이르러 한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다. 이때의 중수는 기금이 고갈되어 더 이상 산향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930년의 준칙은 총 23개 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1896년의「 입의」를 보완하여 산향계의 운영 전반에 대한 보다 세세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1930년에 중수한 이래 1980년대까지 세동리 산향계는 50년 이상 제 기능을 유지하며 존속해 왔다. 그러나 이농현상 등으로 계원 수가 줄고, 남아 있는 계원들도 고령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기능을 상실한 채 유명무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1997년부터는 정기적인 계모임도 사실상 중단되었고, 봄·가을로 지내는 산신제만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공주상세동산신도’와 산향계문서 일체는 2009년에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 기탁되어 보관 중이다. | 역사 | ‘공주세동리산향계문서’는 공주시 유구읍 세동리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19세기 후반부터 조직·운영해 온 산향계 자료이다. 산향계란 산신제의 비용을 충당하고, 산신도와 산제당 등을 유지·보수할 목적으로 조직된 [동제계](/topic/동제계)(洞祭契)의 일종이다. 세동리(細洞里)는 태화산(泰華山)을 중심으로 해발 400~600m의 높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깊은 산골로 상세동(상동), 중세동(안말), 하세동(양지뜸)의 세 [마을](/topic/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산향계는 세동리 중에서도 산제당이 위치한 상세동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현재 전하는 산향계문서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병신년(1896) 3월의 『산향계좌목(山饗稧座目)』과 「축원문(祝願文)」이다. 이해는 ‘[공주상세동산신도](/topic/공주상세동산신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9호)’의 제작 연도, 산제당의 초창 연도와도 일치한다. 즉 산제당을 짓고 인근 마곡사(麻谷寺)의 화승(畵僧)으로부터 특별히 산신도를 제작해 모셨는가 하면, 이를 잘 유지하기 위해 산향계를 조직하는 등 병신년은 세동리 산신제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이다. 세동리 산향계는 1896년에 처음 조직된 이래 1930년에 한 차례 중수되었다. 산향계의 설립과 관련해서는 『산향계좌목』 「입의(立議)」편에 “산 아래 거주하는 사람들이 봄·가을로 산신제를 지낸 뒤 계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1896년 조직된 이래 35년을 이어오던 산향계는 1930년에 이르러 한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다. 이때의 중수는 기금이 고갈되어 더 이상 산향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930년의 준칙은 총 23개 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1896년의「 입의」를 보완하여 산향계의 운영 전반에 대한 보다 세세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1930년에 중수한 이래 1980년대까지 세동리 산향계는 50년 이상 제 기능을 유지하며 존속해 왔다. 그러나 이농현상 등으로 계원 수가 줄고, 남아 있는 계원들도 고령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기능을 상실한 채 유명무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1997년부터는 정기적인 계모임도 사실상 중단되었고, 봄·가을로 지내는 산신제만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공주상세동산신도’와 산향계문서 일체는 2009년에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 기탁되어 보관 중이다. | 의의 | 세동리산향계문서는 [마을](/topic/마을)신앙과 관련하여 생산된 문서로서 19세기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산신제는 물론 사회·경제 등 마을신앙을 둘러싼 다방면의 현상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과거 전통사회에서 민속관행의 본질과 변천을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더구나 산신제와 마을 어귀의 수구(水口)막이 선돌에서 지내는 노신제가 전승되고 있어 연행 현장과 문서를 함께 조사하여 연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참고문헌 | 공주의 전통[마을](/topic/마을) 5 (공주문화원, 2006)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공주 상세동 산신도와 산향계 문서 (유병덕, 향토연구 33, 충남향토연구회, 2009) 공주태화산 산향계(山饗契)의 성격과 산신제 (강성복·박종익, 한국민속학51, 한국민속학회, 2010) | 의의 | 세동리산향계문서는 [마을](/topic/마을)신앙과 관련하여 생산된 문서로서 19세기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산신제는 물론 사회·경제 등 마을신앙을 둘러싼 다방면의 현상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과거 전통사회에서 민속관행의 본질과 변천을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더구나 산신제와 마을 어귀의 수구(水口)막이 선돌에서 지내는 노신제가 전승되고 있어 연행 현장과 문서를 함께 조사하여 연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참고문헌 | 공주의 전통[마을](/topic/마을) 5 (공주문화원, 2006) 조선후기 충청지역의 동제 연구 (강성복, 공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공주 상세동 산신도와 산향계 문서 (유병덕, 향토연구 33, 충남향토연구회, 2009) 공주태화산 산향계(山饗契)의 성격과 산신제 (강성복·박종익, 한국민속학51, 한국민속학회,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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