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강원감영지

한국무속신앙사전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이 있던 자리.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에 있으며, 2002년 3월 9일에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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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이 있던 자리.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에 있으며, 2002년 3월 9일에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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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순
정의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이 있던 자리.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에 있으며, 2002년 3월 9일에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이 있던 자리.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에 있으며, 2002년 3월 9일에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참조[원주강원감영제](/topic/원주강원감영제)
참고문헌강원감영지 (김성찬 역주, 원주[사료](/topic/사료)총서 6, 원주시, 2006)
강원감영-청운당지 주변 발굴조사 보고서 (지현병 외, 강원문화재연구소?원주시, 2006)
강원감영 (원주시, 2009)
참조[원주강원감영제](/topic/원주강원감영제)
참고문헌강원감영지 (김성찬 역주, 원주[사료](/topic/사료)총서 6, 원주시, 2006)
강원감영-청운당지 주변 발굴조사 보고서 (지현병 외, 강원문화재연구소?원주시, 2006)
강원감영 (원주시, 2009)
내용원주 시내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강원감영지는 선화당․포정루․중삼문․내삼문․내아․행각 등 건물과 공방고․책방이 있던 터가 정리되어 있고, 선정비군에 여러 개의 비석이 서 있다. 그리고 선화당 뒤쪽의 책방지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강원감영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수령 600여년의 고목이다.

선화당은 강원감영의 본관 건물로, 강원도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곳이다.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편액](/topic/편액)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행정, 농정, 조세, 재판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현재 강원감영제의 유교식 제례인 ‘관찰사고유제’가 이곳 선화당에서 행해진다. 조선시대에도 관찰사가 부임하면 [치악산](/topic/치악산)동악단에서 동악제를 지낸 다음 선화당에서 고유제를 지냈다고 한다.

강원감영의 정문인 포정루는 ‘포정(布政)’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이다. 포정루는 그동안 ‘선위루(宣威樓)’,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 등의 편액을 달았다가 1991년 문헌에 근거하여 조선시대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布政樓)’로 편액을 바꿔 달았다.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정전(正殿)인 선화당으로 들어가려면 포정문을 거쳐 중삼문을 지나 내삼문을 통과해야 했다. 현재 강원감영지에는 중삼문과 내삼문이 복원되어 있다. 이외에도 ‘청운당’이라 불리는 내아(內衙)와 행각이 있다.

터를 복원한 것은 공방[고지](/topic/고지)(工房庫址)와 책방지이다. 공방고지는 공방에서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보관한 창고인 공방고가 있던 자리이다. 책방지 옆에 있는 느티나무는 인근 주민들이 둥치에서 뻗은 두 [가지](/topic/가지)를 암수로 보고 신성시하여 제를 지내던 나무라고 한다.

강원감영지는 이밖에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여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topic/담장)터, 행각터 등과 선화당 뒤쪽에 있는 연못터인 방지의 호안석축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관아의 건축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계속해서 관풍각, 봉래각, 환선정, 연지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내용원주 시내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강원감영지는 선화당․포정루․중삼문․내삼문․내아․행각 등 건물과 공방고․책방이 있던 터가 정리되어 있고, 선정비군에 여러 개의 비석이 서 있다. 그리고 선화당 뒤쪽의 책방지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강원감영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수령 600여년의 고목이다.

선화당은 강원감영의 본관 건물로, 강원도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곳이다.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편액](/topic/편액)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행정, 농정, 조세, 재판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현재 강원감영제의 유교식 제례인 ‘관찰사고유제’가 이곳 선화당에서 행해진다. 조선시대에도 관찰사가 부임하면 [치악산](/topic/치악산)동악단에서 동악제를 지낸 다음 선화당에서 고유제를 지냈다고 한다.

강원감영의 정문인 포정루는 ‘포정(布政)’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이다. 포정루는 그동안 ‘선위루(宣威樓)’,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 등의 편액을 달았다가 1991년 문헌에 근거하여 조선시대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布政樓)’로 편액을 바꿔 달았다.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정전(正殿)인 선화당으로 들어가려면 포정문을 거쳐 중삼문을 지나 내삼문을 통과해야 했다. 현재 강원감영지에는 중삼문과 내삼문이 복원되어 있다. 이외에도 ‘청운당’이라 불리는 내아(內衙)와 행각이 있다.

터를 복원한 것은 공방[고지](/topic/고지)(工房庫址)와 책방지이다. 공방고지는 공방에서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보관한 창고인 공방고가 있던 자리이다. 책방지 옆에 있는 느티나무는 인근 주민들이 둥치에서 뻗은 두 [가지](/topic/가지)를 암수로 보고 신성시하여 제를 지내던 나무라고 한다.

강원감영지는 이밖에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여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topic/담장)터, 행각터 등과 선화당 뒤쪽에 있는 연못터인 방지의 호안석축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관아의 건축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계속해서 관풍각, 봉래각, 환선정, 연지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역사강원감영은 강원도 내 26개 부․목․군․현을 관할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1395년(태조 4)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한 곳이다.

태조 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영동의 강릉도(江陵道)와 영서의 교주도(交州道)가 강원도로 합쳐지면서 원주에 감영을 설치하게 되었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각 도의 감영은 도내(道內)의 계수관(界首官)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하되 한양(漢陽)으로부터 도계(到界) 지점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 강원도 계수관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이며, 지리적으로 한성부에서 가장 가까운 도계 지점이고, 도내를 순력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75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관찰영(觀察營)’ 항목에 건물의 동수(棟數)와 칸수[間數]가 기록되어 있다. 4[대문](/topic/대문)을 각각 하나의 건물로 볼 때, 선화당을 비롯하여 객사(客舍), 포정루 등 총 31동 509칸이었다. 1830년대에 편찬된 『관동지(關東誌)』 ‘강원감영 영지(江原監營 營誌)’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총 33동 450칸으로 관풍각의 칸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75년에 강원감영의 건물은 43동 459칸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규모를 알 수 있고, ‘1893년 중기(重記)’의 기록 등을 감안하면 19세기 말 강원감영에 있던 건물은 적어도 50동 670칸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

강원감영은 이후 1895년에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원주가 충주부에 소속됨으로써 감영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1896년 이후에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의 본부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원주헌병수비대가 사용한 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지금까지 도심 속에 선화당․포정루․청운당의 일부 건물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1995년에 강원 정도 600주년을 맞아 도심 속 역사문화사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2000년부터 선화당, 포정루, 중삼문, 내삼문, 행각(行閣) 등 시설을 정비․복원하여 2005년 8월 3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역사강원감영은 강원도 내 26개 부․목․군․현을 관할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1395년(태조 4)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한 곳이다.

태조 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영동의 강릉도(江陵道)와 영서의 교주도(交州道)가 강원도로 합쳐지면서 원주에 감영을 설치하게 되었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각 도의 감영은 도내(道內)의 계수관(界首官)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하되 한양(漢陽)으로부터 도계(到界) 지점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 강원도 계수관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이며, 지리적으로 한성부에서 가장 가까운 도계 지점이고, 도내를 순력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75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관찰영(觀察營)’ 항목에 건물의 동수(棟數)와 칸수[間數]가 기록되어 있다. 4[대문](/topic/대문)을 각각 하나의 건물로 볼 때, 선화당을 비롯하여 객사(客舍), 포정루 등 총 31동 509칸이었다. 1830년대에 편찬된 『관동지(關東誌)』 ‘강원감영 영지(江原監營 營誌)’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총 33동 450칸으로 관풍각의 칸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75년에 강원감영의 건물은 43동 459칸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규모를 알 수 있고, ‘1893년 중기(重記)’의 기록 등을 감안하면 19세기 말 강원감영에 있던 건물은 적어도 50동 670칸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

강원감영은 이후 1895년에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원주가 충주부에 소속됨으로써 감영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1896년 이후에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의 본부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원주헌병수비대가 사용한 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지금까지 도심 속에 선화당․포정루․청운당의 일부 건물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1995년에 강원 정도 600주년을 맞아 도심 속 역사문화사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2000년부터 선화당, 포정루, 중삼문, 내삼문, 행각(行閣) 등 시설을 정비․복원하여 2005년 8월 3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형태강원감영지(江原監營址)는 전체면적이 9,608.6㎡로,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宣化堂)․포정루(布政樓)․청운당 등이 원래 위치에 남아 있다. 또 중삼문지, 내삼문지, [담장](/topic/담장)지 등 관련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 건물지 등이 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강원감영 청사로 사용된 선화당은 정면 7칸과 측면 4칸의 단층이며,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이다. 선화당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원주목사 이후산(李後山, 1597~1675)이 1667년(현종 8)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내부는 네 방향에 내진주(內陳柱)를 세워 모두 [툇간](/topic/툇간)으로 달았으며, 바닥은 [우물](/topic/우물)[마루](/topic/마루)를 깔았고 [천장](/topic/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선화당의 정문인 포정루는 2층 누각으로서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초[익공](/topic/익공)집으로 팔작지붕에 겹[처마](/topic/처마)이다. 1667년 선화당이 건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가운데 6․25전쟁 때 파손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문루(門樓)는 직사각형 [초석](/topic/초석)(礎石) 위에 민[흘림기둥](/topic/흘림기둥)이며 2층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주위에 계자[난간](/topic/난간)(鷄子欄干)을 돌렸으며 궁창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화당 옆에는 [온돌](/topic/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 자형 목조 [기와집](/topic/기와집)인 청운당이 있다. 청운당은 후대에 옮겨지어진 건물이다.
형태강원감영지(江原監營址)는 전체면적이 9,608.6㎡로,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宣化堂)․포정루(布政樓)․청운당 등이 원래 위치에 남아 있다. 또 중삼문지, 내삼문지, [담장](/topic/담장)지 등 관련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 건물지 등이 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강원감영 청사로 사용된 선화당은 정면 7칸과 측면 4칸의 단층이며,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이다. 선화당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원주목사 이후산(李後山, 1597~1675)이 1667년(현종 8)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내부는 네 방향에 내진주(內陳柱)를 세워 모두 [툇간](/topic/툇간)으로 달았으며, 바닥은 [우물](/topic/우물)[마루](/topic/마루)를 깔았고 [천장](/topic/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선화당의 정문인 포정루는 2층 누각으로서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초[익공](/topic/익공)집으로 팔작지붕에 겹[처마](/topic/처마)이다. 1667년 선화당이 건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가운데 6․25전쟁 때 파손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문루(門樓)는 직사각형 [초석](/topic/초석)(礎石) 위에 민[흘림기둥](/topic/흘림기둥)이며 2층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주위에 계자[난간](/topic/난간)(鷄子欄干)을 돌렸으며 궁창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화당 옆에는 [온돌](/topic/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 자형 목조 [기와집](/topic/기와집)인 청운당이 있다. 청운당은 후대에 옮겨지어진 건물이다.
민속원완도 장좌리 당제나경수1998
국립민속박물관한국세시풍속사전 정월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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