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에서 행해지는 장승제. 산신제와 함께 [마을](/topic/마을) 제의의 한 과정으로 행해졌다. 지금은 산신제가 단절되고 장승제만 행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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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이용범 |
정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에서 행해지는 장승제. 산신제와 함께 [마을](/topic/마을) 제의의 한 과정으로 행해졌다. 지금은 산신제가 단절되고 장승제만 행해진다. | 정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에서 행해지는 장승제. 산신제와 함께 [마을](/topic/마을) 제의의 한 과정으로 행해졌다. 지금은 산신제가 단절되고 장승제만 행해진다. | 내용 | [장승제](/topic/장승제)는 2년에 한 번 음력 이월 초순에 날을 잡아 행한다. 이때 제의를 주관할 당주와 [화주](/topic/화주)를 함께 정한다. 당주와 화주는 부정이 없는 깨끗한 남자 중에서 선정한다. 당주는 집 앞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깔아 외인(外人)의 출입을 금하고, 자신도 집 밖으로 나[가지](/topic/가지) 않는다. 또한 언행을 삼가며 부부가 한 방에 들지 않는다. 화주도 동일한 금기를 지키지만 집 밖으로 다닐 수 있어 제수(祭需)는 화주가 장만한다. 제수 장만은 당주 집에서 한다. 당주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산신제에 쓸 조라를 빚을 때이다. 당주는 제의 이틀 전에 대동샘의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쌀 한 되로 작은 오지단지에 술을 빚어 산으로 올라가 산신제 제당 터를 파서 묻는다. 장승목을 선정하고 장승을 만드는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정월에 미리 어른들이 살펴봐서 장승목으로 쓸 오리나무를 정해 두었다가 장승제 하루 전에 베어다가 미라울 [마을](/topic/마을)에서 만든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장승제 당일에 장승목을 선정해 장승을 만든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장승제 당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나무 밑동이 20~30㎝의 오리나무로 장승목을 정한다. 나무가 정해지면 그 나무에 막걸리를 부어 놓는다. 나무를 베어 마을로 가져와 장승을 깎는다. 장승은 남장승 2기와 여장승 2기를 만들며, 솟대도 만든다. 장승의 머리는 나무의 밑부분으로 만든다. 여장승은 남장승을 만든 나무의 나머지 부분으로 만든다. 역시 나무의 아랫부분이 여장승의 머리가 된다. 장승을 만든 다음에는 안면 부분에 황토를 바른다. 그리고 남장승에 ‘천하대[장군](/topic/장군)(天下大將軍)’, 여장승에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한다. 장승을 만든 다음 남장승과 여장승이 길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게 세운다. 장승 한 쌍은 미라울 마을, 다른 한 쌍은 새말에 각각 세운다. 솟대는 Y 자형 나무를 기러기 모양으로 깎아 긴 장대에 꽂아 세운다. 솟대는 서울 쪽(북쪽)을 향하도록 한다. 이 마을에서는 솟대를 ‘기러기대’라고 부른다. 장승을 세운 다음에 곧바로 장승제를 지낸다. 이전에는 밤에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나서 장승제를 지냈으나 근래에는 장승을 깎아 세운 뒤 바로 장승제를 지낸다. 장승제에 쓸 제물은 화주가 준비한다. 제물은 경안과 신장의 장시를 번갈아 이용하였지만 현재는 슈퍼마켓도 이용한다. 제사 비용은 옛날에는 쌀을 걷고 술을 빚어서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대동 걸립(乞粒)으로 충당했다. 지금은 마을기금을 기본으로 하고 시에서 받은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대체로 백설기, 밤, [대추](/topic/대추), 곶감, 두부, 포([통북어](/topic/통북어)) 정도이며, 과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소쿠리](/topic/소쿠리)에 담아 올린다. 제주(祭酒)로는 막걸리를 사용하며, 산신제에서는 당주가 담은 조라를 쓴다. 돼지머리나 쇠머리 같은 육류가 제물로 오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제물을 올린 다음 당주가 먼저 술을 따르고 재배한 다음 간단하게 준비된 축을 읽는다. 다시 술을 따르고 당주의 재배가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이름과 생년을 밝히면서 가구별로 다 올려준다. 소지가 끝나면 통북어를 장승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장승제를 마친다. 이전에는 장승제가 끝나면 당주와 화주는 저녁을 먹고 개울물로 몸을 씻고 밤 9~10시쯤에 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1910년 무렵에는 장승터에서 도당굿을 하였고, 난장도 들어섰다고 한다. | 참고문헌 | 장승제의 실상 (김태곤, 동방학지 3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3) 광주시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경기도의 마을신앙과 제당,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 내용 | [장승제](/topic/장승제)는 2년에 한 번 음력 이월 초순에 날을 잡아 행한다. 이때 제의를 주관할 당주와 [화주](/topic/화주)를 함께 정한다. 당주와 화주는 부정이 없는 깨끗한 남자 중에서 선정한다. 당주는 집 앞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깔아 외인(外人)의 출입을 금하고, 자신도 집 밖으로 나[가지](/topic/가지) 않는다. 또한 언행을 삼가며 부부가 한 방에 들지 않는다. 화주도 동일한 금기를 지키지만 집 밖으로 다닐 수 있어 제수(祭需)는 화주가 장만한다. 제수 장만은 당주 집에서 한다. 당주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산신제에 쓸 조라를 빚을 때이다. 당주는 제의 이틀 전에 대동샘의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쌀 한 되로 작은 오지단지에 술을 빚어 산으로 올라가 산신제 제당 터를 파서 묻는다. 장승목을 선정하고 장승을 만드는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정월에 미리 어른들이 살펴봐서 장승목으로 쓸 오리나무를 정해 두었다가 장승제 하루 전에 베어다가 미라울 [마을](/topic/마을)에서 만든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장승제 당일에 장승목을 선정해 장승을 만든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장승제 당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나무 밑동이 20~30㎝의 오리나무로 장승목을 정한다. 나무가 정해지면 그 나무에 막걸리를 부어 놓는다. 나무를 베어 마을로 가져와 장승을 깎는다. 장승은 남장승 2기와 여장승 2기를 만들며, 솟대도 만든다. 장승의 머리는 나무의 밑부분으로 만든다. 여장승은 남장승을 만든 나무의 나머지 부분으로 만든다. 역시 나무의 아랫부분이 여장승의 머리가 된다. 장승을 만든 다음에는 안면 부분에 황토를 바른다. 그리고 남장승에 ‘천하대[장군](/topic/장군)(天下大將軍)’, 여장승에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한다. 장승을 만든 다음 남장승과 여장승이 길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게 세운다. 장승 한 쌍은 미라울 마을, 다른 한 쌍은 새말에 각각 세운다. 솟대는 Y 자형 나무를 기러기 모양으로 깎아 긴 장대에 꽂아 세운다. 솟대는 서울 쪽(북쪽)을 향하도록 한다. 이 마을에서는 솟대를 ‘기러기대’라고 부른다. 장승을 세운 다음에 곧바로 장승제를 지낸다. 이전에는 밤에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나서 장승제를 지냈으나 근래에는 장승을 깎아 세운 뒤 바로 장승제를 지낸다. 장승제에 쓸 제물은 화주가 준비한다. 제물은 경안과 신장의 장시를 번갈아 이용하였지만 현재는 슈퍼마켓도 이용한다. 제사 비용은 옛날에는 쌀을 걷고 술을 빚어서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대동 걸립(乞粒)으로 충당했다. 지금은 마을기금을 기본으로 하고 시에서 받은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대체로 백설기, 밤, [대추](/topic/대추), 곶감, 두부, 포([통북어](/topic/통북어)) 정도이며, 과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소쿠리](/topic/소쿠리)에 담아 올린다. 제주(祭酒)로는 막걸리를 사용하며, 산신제에서는 당주가 담은 조라를 쓴다. 돼지머리나 쇠머리 같은 육류가 제물로 오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제물을 올린 다음 당주가 먼저 술을 따르고 재배한 다음 간단하게 준비된 축을 읽는다. 다시 술을 따르고 당주의 재배가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이름과 생년을 밝히면서 가구별로 다 올려준다. 소지가 끝나면 통북어를 장승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장승제를 마친다. 이전에는 장승제가 끝나면 당주와 화주는 저녁을 먹고 개울물로 몸을 씻고 밤 9~10시쯤에 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1910년 무렵에는 장승터에서 도당굿을 하였고, 난장도 들어섰다고 한다. | 참고문헌 | 장승제의 실상 (김태곤, 동방학지 3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3) 광주시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경기도의 마을신앙과 제당,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 역사 | 예전에는 엄미1리에서 2리를 거쳐 남한산성 방면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고, 그 길가에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엄미2리에만 [장승제](/topic/장승제)가 전승된다. 엄미2리 장승은 미라울과 새말 두 [마을](/topic/마을)에 위치해 있다. 새말을 거쳐 미라울의 좁은 길로 걸어가면 남한산성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인적이 드물지만 옛날에는 그 너머가 면 소재지여서 왕래가 잦은 길이었다. 장승은 이곳 교통상의 편리성 때문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새말 남장승에는‘서울 70리 수원 70리 이천 70리’라고 하단에 이정표가 묵서(墨書)되어 있다. 1988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옛 길이 끊기고, [서낭당](/topic/서낭당)과 장승이 있던 곳으로 도로가 나면서 자연스럽게 장승제와 산신제가 사라졌다. 현재는 고속도로에서 상대적으로 조금 떨어진 엄미2리에만 장승제가 계승되고 있다. | 역사 | 예전에는 엄미1리에서 2리를 거쳐 남한산성 방면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고, 그 길가에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엄미2리에만 [장승제](/topic/장승제)가 전승된다. 엄미2리 장승은 미라울과 새말 두 [마을](/topic/마을)에 위치해 있다. 새말을 거쳐 미라울의 좁은 길로 걸어가면 남한산성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인적이 드물지만 옛날에는 그 너머가 면 소재지여서 왕래가 잦은 길이었다. 장승은 이곳 교통상의 편리성 때문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새말 남장승에는‘서울 70리 수원 70리 이천 70리’라고 하단에 이정표가 묵서(墨書)되어 있다. 1988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옛 길이 끊기고, [서낭당](/topic/서낭당)과 장승이 있던 곳으로 도로가 나면서 자연스럽게 장승제와 산신제가 사라졌다. 현재는 고속도로에서 상대적으로 조금 떨어진 엄미2리에만 장승제가 계승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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