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성황당 안에 모셔져 있는 남녀 한 쌍의 목상으로, 성황신의 신체(神體). 1976년 9월 30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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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표인주 |
정의 | 성황당 안에 모셔져 있는 남녀 한 쌍의 목상으로, 성황신의 신체(神體). 1976년 9월 30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성황당 안에 모셔져 있는 남녀 한 쌍의 목상으로, 성황신의 신체(神體). 1976년 9월 30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동국여지승람](/topic/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옥과에는 현의 동쪽에 성황단을 모셨다고 하고, 구전에 따르면 옥과성황제는 무당들이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지방관이 제의를 주관하고 집전했으나 조선 후기부터는 그 고을 아전과 한량, [광대](/topic/광대), 기생들로 구성된 삼색계원들이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매년 음력 삼짇날(3월 3일)에 모셨다. 제당 앞 광장에다 긴 서낭대를 세워 여덟 가닥의 왼새끼줄을 늘어놓았고, 이 줄에 오색 헝겊을 끼워 꾸몄다고 한다. 이때 남도 각지에서 모여든 광대, 기생, 무녀들이 연 사흘에 걸쳐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면서 [농악](/topic/농악)으로 화려하고 성대한 [제전](/topic/제전)을 펼쳤다고 한다. 그러나 제의 절차, 내용, 과정 등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옥과현이 1914년 곡성군에 통합되기 전까지는 고을이 주체가 되어 국가 주도로 옥과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무당들이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것도 중단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성황당을 현 위치로 옮긴 뒤 [마을](/topic/마을) 노인회관에서 주관하여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모셨다. 제사는 가정에서 지내는 [기제사](/topic/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며, 2005~2006년부터는 이마저도 올리지 않는다. 제비를 염출하기 위해서는 걸립을 해야 하지만 협조가 잘 안 되고, 행정관청의 지원 또한 없어 노인회에서 제사를 모시고는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 내용 | 『[동국여지승람](/topic/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옥과에는 현의 동쪽에 성황단을 모셨다고 하고, 구전에 따르면 옥과성황제는 무당들이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지방관이 제의를 주관하고 집전했으나 조선 후기부터는 그 고을 아전과 한량, [광대](/topic/광대), 기생들로 구성된 삼색계원들이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매년 음력 삼짇날(3월 3일)에 모셨다. 제당 앞 광장에다 긴 서낭대를 세워 여덟 가닥의 왼새끼줄을 늘어놓았고, 이 줄에 오색 헝겊을 끼워 꾸몄다고 한다. 이때 남도 각지에서 모여든 광대, 기생, 무녀들이 연 사흘에 걸쳐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면서 [농악](/topic/농악)으로 화려하고 성대한 [제전](/topic/제전)을 펼쳤다고 한다. 그러나 제의 절차, 내용, 과정 등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옥과현이 1914년 곡성군에 통합되기 전까지는 고을이 주체가 되어 국가 주도로 옥과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무당들이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것도 중단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성황당을 현 위치로 옮긴 뒤 [마을](/topic/마을) 노인회관에서 주관하여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모셨다. 제사는 가정에서 지내는 [기제사](/topic/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며, 2005~2006년부터는 이마저도 올리지 않는다. 제비를 염출하기 위해서는 걸립을 해야 하지만 협조가 잘 안 되고, 행정관청의 지원 또한 없어 노인회에서 제사를 모시고는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 형태 | 성황당에는 만취정(晩翠亭)이라는 노인정이 있고, 옥산사(玉山祠)의 왼쪽에 있다. 건축양식은 단칸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이며, 성황당의 전면에 [현판](/topic/현판)이 있다. 이 성황당은 세 번의 이거 끝에 현 위치에 모셔졌다. 처음은 [마을](/topic/마을) 동쪽의 ‘[서낭당](/topic/서낭당) 모퉁이’로 불리는 곳에 있다가 퇴락하여 현재 옥과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곳이 학교 부지로 들어가자 다시 마을 서쪽 끝인 율사리로 옮겼다가, 1976년에 현 옥과리 옥산사 옆에 성황당을 짓고 그 안에 2구의 본신상을 안치했다. 성황당 안에는 이 고장 출신으로 전하는 고려시대 조통 [장군](/topic/장군)과 그를 사모했다는 공주의 목상이 단 위에 모셔져 있다. 이들은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서 있는 모습의 남자상은 높이 80㎝, 두께 20㎝이다. 그리고 무당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발등까지 내려오는 사제복 형태의 옷을 입고 허리끈을 매었다. 허리끈은 끝이 길게 늘어져 발등까지 내려왔다. 둥근 얼굴에 크고 굵은 눈썹이 표현되어 있고, 눈이 돌출되어 장승 같은 느낌이다. 앉아 있는 모습의 여자상은 높이 70㎝, 두께 15㎝이다. 머리에 [고깔](/topic/고깔)을 썼으며, 손은 두 손을 모아 양 손가락 끝을 붙여 아래로 향하고 있어 무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얼굴 표현은 남자상에 비해 정교하며, 자세도 다소곳하다. 남자상과 여자상의 밑에는 구멍이 있어 나무를 끼고 다닐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 형태 | 성황당에는 만취정(晩翠亭)이라는 노인정이 있고, 옥산사(玉山祠)의 왼쪽에 있다. 건축양식은 단칸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이며, 성황당의 전면에 [현판](/topic/현판)이 있다. 이 성황당은 세 번의 이거 끝에 현 위치에 모셔졌다. 처음은 [마을](/topic/마을) 동쪽의 ‘[서낭당](/topic/서낭당) 모퉁이’로 불리는 곳에 있다가 퇴락하여 현재 옥과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곳이 학교 부지로 들어가자 다시 마을 서쪽 끝인 율사리로 옮겼다가, 1976년에 현 옥과리 옥산사 옆에 성황당을 짓고 그 안에 2구의 본신상을 안치했다. 성황당 안에는 이 고장 출신으로 전하는 고려시대 조통 [장군](/topic/장군)과 그를 사모했다는 공주의 목상이 단 위에 모셔져 있다. 이들은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서 있는 모습의 남자상은 높이 80㎝, 두께 20㎝이다. 그리고 무당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발등까지 내려오는 사제복 형태의 옷을 입고 허리끈을 매었다. 허리끈은 끝이 길게 늘어져 발등까지 내려왔다. 둥근 얼굴에 크고 굵은 눈썹이 표현되어 있고, 눈이 돌출되어 장승 같은 느낌이다. 앉아 있는 모습의 여자상은 높이 70㎝, 두께 15㎝이다. 머리에 [고깔](/topic/고깔)을 썼으며, 손은 두 손을 모아 양 손가락 끝을 붙여 아래로 향하고 있어 무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얼굴 표현은 남자상에 비해 정교하며, 자세도 다소곳하다. 남자상과 여자상의 밑에는 구멍이 있어 나무를 끼고 다닐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 의의 | 곡성옥과성황당목조신상은 호남지방의 성황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민속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1055년(고려 문종 9)에 성황신사를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성황신은 본래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의 신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는 물론 고을마다 국가 주도의 제사로 성황단을 만들어 성황신을 모셨다. 그것은 성황신이 단순한 신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국가 운명과 성쇠를 반영하는 상징물로까지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 이래로 무당과 각 고을의 성황제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당이 성황제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각 도에 성황사가 건립되면서 지방에도 점차 성황사가 확산되었다. 그로 인해 각 도에 성황사가 적게는 20개에서 많게는 60개가 넘었으며, 전라도에는 58개의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옥과성황당목조신상은 국가 주도에서 [마을](/topic/마을)공동체 단위의 제사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속신앙적 의미가 크다. 특히 ‘아왕공주와 조통의 전설’은 옥과성황당 성황신의 유래를 설명하는 고을신화적 의미뿐만 아니라 전라도지방 무속신앙의 [무조신](/topic/무조신)(巫祖神)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속신화](/topic/무속신화)적 가치도 크다. | 참고문헌 | 무조아왕공주고 (김정업, 한국민속학 7, 한국민속학회, 1974) [마을](/topic/마을)유래지 (곡성군, 1986) 곡성군의 문화유적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 1996) 남도설화문학연구 (표인주, 민속원, 2000) | 의의 | 곡성옥과성황당목조신상은 호남지방의 성황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민속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1055년(고려 문종 9)에 성황신사를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성황신은 본래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의 신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는 물론 고을마다 국가 주도의 제사로 성황단을 만들어 성황신을 모셨다. 그것은 성황신이 단순한 신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국가 운명과 성쇠를 반영하는 상징물로까지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 이래로 무당과 각 고을의 성황제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당이 성황제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각 도에 성황사가 건립되면서 지방에도 점차 성황사가 확산되었다. 그로 인해 각 도에 성황사가 적게는 20개에서 많게는 60개가 넘었으며, 전라도에는 58개의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옥과성황당목조신상은 국가 주도에서 [마을](/topic/마을)공동체 단위의 제사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속신앙적 의미가 크다. 특히 ‘아왕공주와 조통의 전설’은 옥과성황당 성황신의 유래를 설명하는 고을신화적 의미뿐만 아니라 전라도지방 무속신앙의 [무조신](/topic/무조신)(巫祖神)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속신화](/topic/무속신화)적 가치도 크다. | 참고문헌 | 무조아왕공주고 (김정업, 한국민속학 7, 한국민속학회, 1974) [마을](/topic/마을)유래지 (곡성군, 1986) 곡성군의 문화유적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 1996) 남도설화문학연구 (표인주, 민속원, 2000) | 유래 | 남자상은 역사적인 인물인 조통(趙通)이다. 조통은 고려 신종 때의 경사백가에 통달한 특별한 문재이자 학자이다. 본은 한양이고 자는 역락, 옥과현 낙천 출신이다. 고려 19대왕 명종(재위 1170~1197) 때 학행으로 왕의 소명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그 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출발로 1197년(신종 즉위)에는 고공원외랑으로 금나라를 다녀왔고, 태자문학을 거쳐 지서북면유수사가 되었다. 1199년(신종 2)에는 [장작](/topic/장작)소감으로서 동경소무사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소부소감으로 진주안무사가 되었으며,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 성한림학사에 이르러 치사했다. 당대 굴지의 문인이자 학자인 이인로·임춘 등과 함께 칠현으로 불렸다. 특히 이인로는 그를 산수우(山水友)로 삼아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조통이 죽자 옥과현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옥과성황당 제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여자상은 [장군](/topic/장군)의 처라는 설과 장군을 사모하다 한을 품고 죽은 공주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옥과에 전승된 구술자료를 보면 젊은 시절에 조통과 이성관계에 있는 실존 인물이었고, 조통이 죽자 그의 혼령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그녀가 죽은 뒤 무속인들이 그녀를 무조(巫祖)로 섬기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왕공주와 조통의 전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왕공주(我王公主)는 고려의 왕녀로, 본명을 공심(公心)이라 하였다. 공주는 당시 널리 이름을 떨치던 [미장](/topic/미장)부(美丈夫) 조통을 연모했다. 공주는 조통에게 접근하여 사랑을 고백했고,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다. 공주는 마침내 결혼해 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르렀고, 부왕의 허락을 얻겠노라 했다. 처자가 있는 몸인 조통은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주의 의사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안 조통은 공주가 있는 개경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때마침 고려의 북변(北邊)이 어지러웠다. 조통은 국왕에게 북변을 진압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자원한 것이 받아들여져 북변을 정벌하는 장군으로 떠났다. 공주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혹한](/topic/혹한) 속에서 매일처럼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투로 인하여 극도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통은 적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었고, 자신도 왼손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조통은 군직을 사퇴한 뒤 불구의 몸을 이끌고 낙향하여 죄인을 자처하며 숨어 살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공주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조통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행방마저도 알 길이 없게 되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공주의 병은 날로 깊어만 갔고 끝내 미치고 말았다. 부왕은 공주를 영험한 산신령이 있는 남산으로 보냈다. 공주는 남산에서 기도와 가무로 산신을 지성으로 섬겼으며,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완쾌할 수 있었다. 공주는 이곳에서 득도한 무속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남산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공주는 부왕이 친필로 써 준 이 道를받으라는 글을 말머리에 붙이고는 말이 가는 대로 맡기었다. 공주를 태운 말은 전주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더니 옥과읍에 와서는 더 나아[가지](/topic/가지) 않고 주저앉았다. 공주는 이곳에 정주하라는 신의 의사로 알고 옥과를 종신의 땅으로 삼았다고 한다. 명기 노주선의 집인 노주각에 살면서 남도 각지에 무속을 전하고 가르치던 공주는 이곳이 조통의 고향임을 비로소 알고 그를 찾았으나 조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공주는 사랑했던 조통의 묘를 보살피면서 무(巫)의 전수에 힘쓰다가 옥과 땅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공주의 죽음이 조정에 전해지자 국왕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두 사람을 사후결혼시켜 공주의 슬픈 넋을 위로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목상(木像)을 조각케 하여 옥과의 수호신으로 성황사에 모시게 했으며, 제사를 받들 제답(祭畓) 100여 두락을 내리었다. | 유래 | 남자상은 역사적인 인물인 조통(趙通)이다. 조통은 고려 신종 때의 경사백가에 통달한 특별한 문재이자 학자이다. 본은 한양이고 자는 역락, 옥과현 낙천 출신이다. 고려 19대왕 명종(재위 1170~1197) 때 학행으로 왕의 소명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그 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출발로 1197년(신종 즉위)에는 고공원외랑으로 금나라를 다녀왔고, 태자문학을 거쳐 지서북면유수사가 되었다. 1199년(신종 2)에는 [장작](/topic/장작)소감으로서 동경소무사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소부소감으로 진주안무사가 되었으며,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 성한림학사에 이르러 치사했다. 당대 굴지의 문인이자 학자인 이인로·임춘 등과 함께 칠현으로 불렸다. 특히 이인로는 그를 산수우(山水友)로 삼아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조통이 죽자 옥과현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옥과성황당 제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여자상은 [장군](/topic/장군)의 처라는 설과 장군을 사모하다 한을 품고 죽은 공주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옥과에 전승된 구술자료를 보면 젊은 시절에 조통과 이성관계에 있는 실존 인물이었고, 조통이 죽자 그의 혼령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그녀가 죽은 뒤 무속인들이 그녀를 무조(巫祖)로 섬기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왕공주와 조통의 전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왕공주(我王公主)는 고려의 왕녀로, 본명을 공심(公心)이라 하였다. 공주는 당시 널리 이름을 떨치던 [미장](/topic/미장)부(美丈夫) 조통을 연모했다. 공주는 조통에게 접근하여 사랑을 고백했고,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다. 공주는 마침내 결혼해 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르렀고, 부왕의 허락을 얻겠노라 했다. 처자가 있는 몸인 조통은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주의 의사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안 조통은 공주가 있는 개경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때마침 고려의 북변(北邊)이 어지러웠다. 조통은 국왕에게 북변을 진압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자원한 것이 받아들여져 북변을 정벌하는 장군으로 떠났다. 공주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혹한](/topic/혹한) 속에서 매일처럼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투로 인하여 극도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통은 적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었고, 자신도 왼손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조통은 군직을 사퇴한 뒤 불구의 몸을 이끌고 낙향하여 죄인을 자처하며 숨어 살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공주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조통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행방마저도 알 길이 없게 되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공주의 병은 날로 깊어만 갔고 끝내 미치고 말았다. 부왕은 공주를 영험한 산신령이 있는 남산으로 보냈다. 공주는 남산에서 기도와 가무로 산신을 지성으로 섬겼으며,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완쾌할 수 있었다. 공주는 이곳에서 득도한 무속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남산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공주는 부왕이 친필로 써 준 이 道를받으라는 글을 말머리에 붙이고는 말이 가는 대로 맡기었다. 공주를 태운 말은 전주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더니 옥과읍에 와서는 더 나아[가지](/topic/가지) 않고 주저앉았다. 공주는 이곳에 정주하라는 신의 의사로 알고 옥과를 종신의 땅으로 삼았다고 한다. 명기 노주선의 집인 노주각에 살면서 남도 각지에 무속을 전하고 가르치던 공주는 이곳이 조통의 고향임을 비로소 알고 그를 찾았으나 조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공주는 사랑했던 조통의 묘를 보살피면서 무(巫)의 전수에 힘쓰다가 옥과 땅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공주의 죽음이 조정에 전해지자 국왕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두 사람을 사후결혼시켜 공주의 슬픈 넋을 위로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목상(木像)을 조각케 하여 옥과의 수호신으로 성황사에 모시게 했으며, 제사를 받들 제답(祭畓) 100여 두락을 내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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