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오티별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천오티별신제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별신제. 2001년 2월 3일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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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별신제. 2001년 2월 3일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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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영
특징산신제와 서낭제로 구성된 동제(洞祭)이다. 산신제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치러지는 유교식 제사로서 남자 위주의 [제관](/topic/제관)들만이 참여하고 풍물이 수반되지 않는다. 서낭제는 개방적이며, 서낭대로 신의(神意)를 직접 확인한다. 풍장이 울리는 잔치 분위기의 제사이다. 한 해는 산신제만 지내고 이듬해에는 산신제와 서낭제를 지낸다. 충북 동북부 지역에서는 [마을](/topic/마을) 단위로 매년 지내는 산신제와 서낭제가 하나의 지역 특색으로 전승되어 온다. 오티별신제는 이러한 지역 전통을 잘 간직한 대표적인 동제이다. 그러나 ‘별신(別神)’이 어떤 신령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외형상 서낭이 별신인 듯 보이지만 신위(神位)나 제물 등은 별신과 전혀 관련이 없다. 무당이 참여하지도 않는다.
특징산신제와 서낭제로 구성된 동제(洞祭)이다. 산신제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치러지는 유교식 제사로서 남자 위주의 [제관](/topic/제관)들만이 참여하고 풍물이 수반되지 않는다. 서낭제는 개방적이며, 서낭대로 신의(神意)를 직접 확인한다. 풍장이 울리는 잔치 분위기의 제사이다. 한 해는 산신제만 지내고 이듬해에는 산신제와 서낭제를 지낸다. 충북 동북부 지역에서는 [마을](/topic/마을) 단위로 매년 지내는 산신제와 서낭제가 하나의 지역 특색으로 전승되어 온다. 오티별신제는 이러한 지역 전통을 잘 간직한 대표적인 동제이다. 그러나 ‘별신(別神)’이 어떤 신령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외형상 서낭이 별신인 듯 보이지만 신위(神位)나 제물 등은 별신과 전혀 관련이 없다. 무당이 참여하지도 않는다.
정의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별신제. 2001년 2월 3일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별신제. 2001년 2월 3일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오티리[吾峙里]는 원래 봉화재, 해너물재, 흰티재, 구실재, 말구리재라는 다섯 고갯마루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 고개는 각각 충주, 제천, 청풍, 지곡, 덕산으로 이어진다. 이들 고개마다 서낭이 모셔져 있다. 지금은 도로 개설로 인하여 해너물재, 흰티재, 구실재는 평탄지가 되었다.

오티별신제는 격년으로 치러진다. ‘별신이 들지 않는 해’에는 산신제와 매차골 서낭제만 지낸다. 이들 제사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모셔진다. 상당인 산신당은 안말 뒷산에 있고, 하당은 [마을](/topic/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이다.

산신제와 더불어 서낭제를 지내는 해, 곧 별신제를 올리는 해에는 ‘봉화재의 상당 서낭’, ‘작은재 서낭’, ‘구실재’, ‘해너물재’, ‘흰티재’의 5개 서낭에서 제사를 지낸 뒤에 마지막으로 이곳 하당에 있는 느티나무를 모신다. 이들 서낭 가운데 봉화재 정상에 있는 ‘상당 서낭’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서낭은 모두 ‘하당 서낭’ 또는 단순히 ‘하당’으로 불린다. 산신당인 상당과 대비되는 하당이 아니라 서낭 가운데에서도 하당에 속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평소에는 이들 네 개의 ‘하당 서낭’과 ‘느티나무 하당’을 구분하지 않고 동민(洞民)들은 모두 ‘하당’이라고 불렀다. 오티별신제가 2001년에 충북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될 무렵부터 느티나무 하당을 ‘본당(本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별신이 드는 해이든 그렇지 않든 안골 산신제를 지낸 뒤에는 이어서 항상 건너편의 매차골에서 서낭제를 지낸다. 이는 매차골만의 동제로서 다섯 고갯마루의 서낭제와는 다른 제사이다. 산신제와 함께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매차골 주민 가운데 [제관](/topic/제관)을 선출한다.

‘별신이 드는 해’에는 열나흗날 산신제와 매차골서낭제를 지내고, 보름날에는 마을을 둘러싼 다섯 고갯마루에서 서낭제를 지낸다.

상당 서낭은 으뜸 서낭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상당 서낭의 위치 역시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봉화산 정상이다. 조선시대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은 곳이라 하여 ‘봉우뚝 서낭’으로도 불린다. 하당 서낭이 이웃 마을과의 경계에 위치하여 오티리의 영역을 확정하고 알리는 실질적인 기능을 한다면 상당 서낭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한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각각의 상당, 곧 산신당과 상당 [서낭당](/topic/서낭당)은 모두 그들의 보조 하위 신인 수비를 거느리고 있다. ‘산신 수비당’은 마을 어귀 느티나무 오른쪽의 산 아래에 있고, ‘상당 서낭 수비당’은 상당 서낭당 바로 앞의 소나무를 신체(神體)로 한다.

먼저 ‘별신이 드는 해’의 산신제와 서낭제를 소개한다.


1. 산신제 : 산신제는 해마다 음력 열나흗날 오후에 안골 서쪽의 골짜기에 위치한 와가(瓦家) 한 칸으로 된 산신당에서 지낸다. 산신당은 예전부터 ‘붉은당’이라고도 불려 왔다. 산신제는 오후 늦게 지낸다. 과거에는 해가 저물고 나서 산신제를 지냈다.

이장과 총무 등 마을 대표들은 아침 일찍 장을 봐서 고양주 집에 제물을 가져다 준다. 산신제 제물 마련은 고양주 집에서 한다. 고양주 내외는 산신제 하루 전에 목욕재계를 하며, 당일에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제물 준비를 한다.

고양주 집에서 제물을 마련하는 사이에 조역을 맡은 사람들은 돼지를 끌고 산으로 간다. 산신당 아래의 조역장에서 도살하여 해체 및 분육(分肉)을 하고, 솥에서 삶아 낸다. 돼지가 어느 정도 삶겼으면 큰 그릇에 받쳐 산신당으로 가져간다.

진설이 끝나면 제관이 [분향](/topic/분향)(焚香)을 하고 [헌작](/topic/헌작)(獻爵)을 한다. [축문](/topic/축문)에 이어 소지를 올린다. 산신소지-대동소지-고을소지-국가소지 순으로 올린 다음 가가호호(家家戶戶)소지를 한 장씩 올려준다. 제관 일행은 조역장에서 [음복](/topic/음복)을 한다. 오티리에서는 산신당 안에서 음복하지 않는다.

하산한 제관, 축관, 고양주, 조역은 함께 하당인 느티나무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제물을 진설하고 분향한 다음 단잔만 올린다. 다음에는 느티나무 하당 바로 옆에 있는 산신 수비당에서 간단히 제사를 지낸다.


2. 매차골서낭제 : 다음으로 매차골 동제인 서낭제를 지낸다. 마을 어귀 오른쪽 언덕 위로 소나무 한 그루와 슬레이트 [지붕](/topic/지붕)을 얹은 당집이 있다. 서낭제의 제관은 매차골 주민 가운데에서 뽑는다. 제물 진설이 끝나면 제관은 분향을 하고 잔을 올린다. 축문은 읽지 않는다. 다음에는 서낭소지를 올리고 나서 국가소지-제천군소지-오티리 마을소지-개인소지-우마소지 순으로 올린다.


3. 상당 서낭제 : 보름날 오전에 오티리의 다섯 고개에 위치한 서낭에게 제를 올린다. 특히 봉화재의 서낭은 더욱 중요시되어 ‘상당 서낭’으로 불린다. 그래서 먼저 상당 서낭을 위하고, 이곳으로부터 가까운 위치 순서대로 서낭 4개에 제를 지낸다. 곧 작은재, 구실재, 흰티재, 해너물재의 차례이다. 근래에는 흰티재와 해너물재의 서낭제는 안골 앞 삼거리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다섯 고개 모두에서 서낭대를 잡기 때문에 [대잡이](/topic/대잡이)를 항시 대동한다.

이른 새벽에 풍장패를 앞세우고 제관과 동민들은 봉화재에 오른다. 서낭당 앞에 다다르면 [기수](/topic/기수)(旗手) 두 명이 깃대를 창(槍)처럼 잡고 정면을 향해 내려 “와!” 하고 크게 외치면서 제당을 한 바퀴 돈다. 기수 뒤로 모든 사람이 따라서 돈다. 이렇게 해야만 잡귀의 범접을 막을 수 있다.

[농악](/topic/농악)패는 쉬지 않고 풍장을 울리고 제관들만이 당집으로 들어가 제사를 지낸다. 술은 단잔을 올리고 축문은 생략한다. 소지는 상당서낭소지-별신제소지-나라소지-마을소지-제관․축관․고양주소지 순으로 올린다. 다음에는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수비에게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수비까지 위하고 나서 비로소 서낭대를 잡는다. 이때 계속해서 풍장이 울리는 가운데 신령이 대에 강림하길 기원한다. 대잡이 곁에는 말솜씨가 좋은 [재담](/topic/재담)꾼이 서서 신령이 대에 잘 강림하시길 기원한다. 이윽고 대에 신령이 내리면 대잡이에게 마을의 현안을 질문하고 신의를 얻는다.


4. 하당 서낭제 : 다음에는 하당 서낭인 작은재, 구실재, 해너물재, 흰티재에서 제를 지낸다. 본래 당집은 없었고 매차나무와 돌무더기가 있었다. 지금은 돌무더기도 없다. 예전에는 이곳 서낭을 지날 때 행인들이 돌이나 동전·헝겊 등을 던져 예를 표했다.

네 개의 하당 서낭제는 모두 동일한 절차와 내용으로 모셔진다. 곧 분향-헌작-재배-소지로 이루어진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다음 서낭을 모실 때마다 술잔이 하나 추가된다는 사실이다. 곧 상당 서낭에서는 한 잔을 올렸지만 작은재에서는 두 잔, 구실재에서는 세 잔, 해너물재에서는 네 잔, 그리고 마지막 흰티재에서는 다섯 잔을 각각 올린다. 결국 서낭의 순위에 따라 각각 다섯, 넷, 셋, 둘, 한 개의 잔을 받게 되는 셈이다. 각 서낭에서도 모두 서낭대에 신령을 내리게 하여 신탁(神託)을 받는다.


5. 본당제(하당제) : 하당 서낭제에 이어 안골 입구에 위치한 느티나무에서 본당제를 지낸다. 산신부터 상․하당에 이르는 마을의 모든 신령을 모시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본당제 제물로 예전에는 통소를 쓸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쇠머리와 우족 네 개만 올린다. 여기서는 잔을 일곱 개 놓는다. 이는 산신, 상당 서낭, 하당 서낭(작은재, 구실재, 해너물재, 흰티재), 하당(느티나무)의 일곱 신령을 위한 것이다. 제를 마치면 역시 서낭대를 잡아서 신의를 묻는다.
서낭대를 놀리고 나면 비로소 본당제가 끝이 난다. 그러면 제물을 내려서 음복을 하고, 구경꾼들까지 모두 모여 식사를 한다.


6. [해물리기](/topic/해물리기) : 마을회관 앞에서 식사를 마치면 마지막 절차로 해물리기를 행한다. 인근에서 쇠를 잘 치기로 유명한 오티리의 풍장패가 한판 요란한 [장단](/topic/장단)과 가락을 쳐 대는 가운데 다시 한 번 서낭대에 신령을 내려 신의를 묻는다.

다음에는 마을의 재담꾼이 [볏짚](/topic/볏짚)으로 만든 [허재비](/topic/허재비)로 해(害)를 물리는 허재비풀이를 한다. 한 쌍의 남녀 허재비는 각각 ‘당나라’와 ‘당초위’라고 부른다. 재담꾼은 이들을 한참 동안 어르고 달래며 중간에 호통도 치고 곤장을 들기도 한다. 마을의 액운과 함께 어서 멀리 도망가라는 주문이다. 이처럼 어르고 달랜 다음에도 나갈 것 같지 않다고 여기면 다시 엎어놓고 곤장을 친다. 엄포를 줄 만큼 주었다고 여기면 곤장을 거두고, [수수](/topic/수수)팥떡이 꽂힌 화살을 허재비를 향해 쏘아댄다. 이때 재담꾼은 “칼로 찌르면 배가 갈라지고! 화살로 찌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 어서 도망을 가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위협한다.

마지막으로 바[가지](/topic/가지)에 여러 제물을 담아서 마을 밖으로 내버린다. 허재비를 비롯한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행위이다. 이번에는 허재비 등이 잘 나갔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마을 바깥 방향으로 식칼을 힘껏 던진다. 이때 칼끝이 마을 밖을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객귀가 나가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칼끝이 밖을 향할 때까지 다시 던진다. 칼끝의 방향이 바깥으로 되어 있으면 땅바닥에 X 자를 긋고 그 가운데에 칼을 꽂는다. 바가지는 한 옆에서 밟아서 깨뜨린다. 재담꾼은 마지막으로 바닥에 침을 퉤하고 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돌아온다. 칼은 그대로 두었다가 해질 무렵에 치운다.

모든 제사 절차가 끝나면 더 이상 풍장을 울리지 않는다. 마을에서 쇳소리가 들리면 나간 객귀가 다시 들어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본당에 모여서 제물을 나누어 먹는다. 제물로 올린 돼지뼈나 쇠뼈는 개가 먹지 못하도록 땅에 묻는다. 이는 신령이 운감한 제물이기 때문에 깨끗이 처리하려는 것이다. 한편 떡과 돼지고기는 양이 많기 때문에 집집에 조금씩 나누어 준다. 쇠머리는 이튿날인 열엿샛날 점심 때 국을 끓여서 나누어 먹는다. 이날을 ‘학개닦는날’이라고 한다. 일종의 [뒤풀이](/topic/뒤풀이)이다. 쇠족은 제사를 지내느라 수고한 고양주, 제관, 축관, 이장 등에게 나누어 준다.

![마을신앙 제천오티별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5515_t_.jpg)
참고문헌제천시 오티별신제 (이창식, 제천문화원, 2001)
오티별신제의 성격 (최명환, 제천 오티별신제의 성격과 특징, 충북문화재연구원 학술세미나, 2010)
오티별신제의 절차와 내용 (남향, 제천 오티별신제의 성격과 특징, 충북문화재연구원 학술세미나, 2010)
내용오티리[吾峙里]는 원래 봉화재, 해너물재, 흰티재, 구실재, 말구리재라는 다섯 고갯마루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 고개는 각각 충주, 제천, 청풍, 지곡, 덕산으로 이어진다. 이들 고개마다 서낭이 모셔져 있다. 지금은 도로 개설로 인하여 해너물재, 흰티재, 구실재는 평탄지가 되었다.

오티별신제는 격년으로 치러진다. ‘별신이 들지 않는 해’에는 산신제와 매차골 서낭제만 지낸다. 이들 제사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모셔진다. 상당인 산신당은 안말 뒷산에 있고, 하당은 [마을](/topic/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이다.

산신제와 더불어 서낭제를 지내는 해, 곧 별신제를 올리는 해에는 ‘봉화재의 상당 서낭’, ‘작은재 서낭’, ‘구실재’, ‘해너물재’, ‘흰티재’의 5개 서낭에서 제사를 지낸 뒤에 마지막으로 이곳 하당에 있는 느티나무를 모신다. 이들 서낭 가운데 봉화재 정상에 있는 ‘상당 서낭’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서낭은 모두 ‘하당 서낭’ 또는 단순히 ‘하당’으로 불린다. 산신당인 상당과 대비되는 하당이 아니라 서낭 가운데에서도 하당에 속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평소에는 이들 네 개의 ‘하당 서낭’과 ‘느티나무 하당’을 구분하지 않고 동민(洞民)들은 모두 ‘하당’이라고 불렀다. 오티별신제가 2001년에 충북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될 무렵부터 느티나무 하당을 ‘본당(本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별신이 드는 해이든 그렇지 않든 안골 산신제를 지낸 뒤에는 이어서 항상 건너편의 매차골에서 서낭제를 지낸다. 이는 매차골만의 동제로서 다섯 고갯마루의 서낭제와는 다른 제사이다. 산신제와 함께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매차골 주민 가운데 [제관](/topic/제관)을 선출한다.

‘별신이 드는 해’에는 열나흗날 산신제와 매차골서낭제를 지내고, 보름날에는 마을을 둘러싼 다섯 고갯마루에서 서낭제를 지낸다.

상당 서낭은 으뜸 서낭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상당 서낭의 위치 역시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봉화산 정상이다. 조선시대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은 곳이라 하여 ‘봉우뚝 서낭’으로도 불린다. 하당 서낭이 이웃 마을과의 경계에 위치하여 오티리의 영역을 확정하고 알리는 실질적인 기능을 한다면 상당 서낭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한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각각의 상당, 곧 산신당과 상당 [서낭당](/topic/서낭당)은 모두 그들의 보조 하위 신인 수비를 거느리고 있다. ‘산신 수비당’은 마을 어귀 느티나무 오른쪽의 산 아래에 있고, ‘상당 서낭 수비당’은 상당 서낭당 바로 앞의 소나무를 신체(神體)로 한다.

먼저 ‘별신이 드는 해’의 산신제와 서낭제를 소개한다.


1. 산신제 : 산신제는 해마다 음력 열나흗날 오후에 안골 서쪽의 골짜기에 위치한 와가(瓦家) 한 칸으로 된 산신당에서 지낸다. 산신당은 예전부터 ‘붉은당’이라고도 불려 왔다. 산신제는 오후 늦게 지낸다. 과거에는 해가 저물고 나서 산신제를 지냈다.

이장과 총무 등 마을 대표들은 아침 일찍 장을 봐서 고양주 집에 제물을 가져다 준다. 산신제 제물 마련은 고양주 집에서 한다. 고양주 내외는 산신제 하루 전에 목욕재계를 하며, 당일에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제물 준비를 한다.

고양주 집에서 제물을 마련하는 사이에 조역을 맡은 사람들은 돼지를 끌고 산으로 간다. 산신당 아래의 조역장에서 도살하여 해체 및 분육(分肉)을 하고, 솥에서 삶아 낸다. 돼지가 어느 정도 삶겼으면 큰 그릇에 받쳐 산신당으로 가져간다.

진설이 끝나면 제관이 [분향](/topic/분향)(焚香)을 하고 [헌작](/topic/헌작)(獻爵)을 한다. [축문](/topic/축문)에 이어 소지를 올린다. 산신소지-대동소지-고을소지-국가소지 순으로 올린 다음 가가호호(家家戶戶)소지를 한 장씩 올려준다. 제관 일행은 조역장에서 [음복](/topic/음복)을 한다. 오티리에서는 산신당 안에서 음복하지 않는다.

하산한 제관, 축관, 고양주, 조역은 함께 하당인 느티나무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제물을 진설하고 분향한 다음 단잔만 올린다. 다음에는 느티나무 하당 바로 옆에 있는 산신 수비당에서 간단히 제사를 지낸다.


2. 매차골서낭제 : 다음으로 매차골 동제인 서낭제를 지낸다. 마을 어귀 오른쪽 언덕 위로 소나무 한 그루와 슬레이트 [지붕](/topic/지붕)을 얹은 당집이 있다. 서낭제의 제관은 매차골 주민 가운데에서 뽑는다. 제물 진설이 끝나면 제관은 분향을 하고 잔을 올린다. 축문은 읽지 않는다. 다음에는 서낭소지를 올리고 나서 국가소지-제천군소지-오티리 마을소지-개인소지-우마소지 순으로 올린다.


3. 상당 서낭제 : 보름날 오전에 오티리의 다섯 고개에 위치한 서낭에게 제를 올린다. 특히 봉화재의 서낭은 더욱 중요시되어 ‘상당 서낭’으로 불린다. 그래서 먼저 상당 서낭을 위하고, 이곳으로부터 가까운 위치 순서대로 서낭 4개에 제를 지낸다. 곧 작은재, 구실재, 흰티재, 해너물재의 차례이다. 근래에는 흰티재와 해너물재의 서낭제는 안골 앞 삼거리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다섯 고개 모두에서 서낭대를 잡기 때문에 [대잡이](/topic/대잡이)를 항시 대동한다.

이른 새벽에 풍장패를 앞세우고 제관과 동민들은 봉화재에 오른다. 서낭당 앞에 다다르면 [기수](/topic/기수)(旗手) 두 명이 깃대를 창(槍)처럼 잡고 정면을 향해 내려 “와!” 하고 크게 외치면서 제당을 한 바퀴 돈다. 기수 뒤로 모든 사람이 따라서 돈다. 이렇게 해야만 잡귀의 범접을 막을 수 있다.

[농악](/topic/농악)패는 쉬지 않고 풍장을 울리고 제관들만이 당집으로 들어가 제사를 지낸다. 술은 단잔을 올리고 축문은 생략한다. 소지는 상당서낭소지-별신제소지-나라소지-마을소지-제관․축관․고양주소지 순으로 올린다. 다음에는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수비에게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수비까지 위하고 나서 비로소 서낭대를 잡는다. 이때 계속해서 풍장이 울리는 가운데 신령이 대에 강림하길 기원한다. 대잡이 곁에는 말솜씨가 좋은 [재담](/topic/재담)꾼이 서서 신령이 대에 잘 강림하시길 기원한다. 이윽고 대에 신령이 내리면 대잡이에게 마을의 현안을 질문하고 신의를 얻는다.


4. 하당 서낭제 : 다음에는 하당 서낭인 작은재, 구실재, 해너물재, 흰티재에서 제를 지낸다. 본래 당집은 없었고 매차나무와 돌무더기가 있었다. 지금은 돌무더기도 없다. 예전에는 이곳 서낭을 지날 때 행인들이 돌이나 동전·헝겊 등을 던져 예를 표했다.

네 개의 하당 서낭제는 모두 동일한 절차와 내용으로 모셔진다. 곧 분향-헌작-재배-소지로 이루어진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다음 서낭을 모실 때마다 술잔이 하나 추가된다는 사실이다. 곧 상당 서낭에서는 한 잔을 올렸지만 작은재에서는 두 잔, 구실재에서는 세 잔, 해너물재에서는 네 잔, 그리고 마지막 흰티재에서는 다섯 잔을 각각 올린다. 결국 서낭의 순위에 따라 각각 다섯, 넷, 셋, 둘, 한 개의 잔을 받게 되는 셈이다. 각 서낭에서도 모두 서낭대에 신령을 내리게 하여 신탁(神託)을 받는다.


5. 본당제(하당제) : 하당 서낭제에 이어 안골 입구에 위치한 느티나무에서 본당제를 지낸다. 산신부터 상․하당에 이르는 마을의 모든 신령을 모시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본당제 제물로 예전에는 통소를 쓸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쇠머리와 우족 네 개만 올린다. 여기서는 잔을 일곱 개 놓는다. 이는 산신, 상당 서낭, 하당 서낭(작은재, 구실재, 해너물재, 흰티재), 하당(느티나무)의 일곱 신령을 위한 것이다. 제를 마치면 역시 서낭대를 잡아서 신의를 묻는다.
서낭대를 놀리고 나면 비로소 본당제가 끝이 난다. 그러면 제물을 내려서 음복을 하고, 구경꾼들까지 모두 모여 식사를 한다.


6. [해물리기](/topic/해물리기) : 마을회관 앞에서 식사를 마치면 마지막 절차로 해물리기를 행한다. 인근에서 쇠를 잘 치기로 유명한 오티리의 풍장패가 한판 요란한 [장단](/topic/장단)과 가락을 쳐 대는 가운데 다시 한 번 서낭대에 신령을 내려 신의를 묻는다.

다음에는 마을의 재담꾼이 [볏짚](/topic/볏짚)으로 만든 [허재비](/topic/허재비)로 해(害)를 물리는 허재비풀이를 한다. 한 쌍의 남녀 허재비는 각각 ‘당나라’와 ‘당초위’라고 부른다. 재담꾼은 이들을 한참 동안 어르고 달래며 중간에 호통도 치고 곤장을 들기도 한다. 마을의 액운과 함께 어서 멀리 도망가라는 주문이다. 이처럼 어르고 달랜 다음에도 나갈 것 같지 않다고 여기면 다시 엎어놓고 곤장을 친다. 엄포를 줄 만큼 주었다고 여기면 곤장을 거두고, [수수](/topic/수수)팥떡이 꽂힌 화살을 허재비를 향해 쏘아댄다. 이때 재담꾼은 “칼로 찌르면 배가 갈라지고! 화살로 찌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 어서 도망을 가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위협한다.

마지막으로 바[가지](/topic/가지)에 여러 제물을 담아서 마을 밖으로 내버린다. 허재비를 비롯한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행위이다. 이번에는 허재비 등이 잘 나갔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마을 바깥 방향으로 식칼을 힘껏 던진다. 이때 칼끝이 마을 밖을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객귀가 나가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칼끝이 밖을 향할 때까지 다시 던진다. 칼끝의 방향이 바깥으로 되어 있으면 땅바닥에 X 자를 긋고 그 가운데에 칼을 꽂는다. 바가지는 한 옆에서 밟아서 깨뜨린다. 재담꾼은 마지막으로 바닥에 침을 퉤하고 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돌아온다. 칼은 그대로 두었다가 해질 무렵에 치운다.

모든 제사 절차가 끝나면 더 이상 풍장을 울리지 않는다. 마을에서 쇳소리가 들리면 나간 객귀가 다시 들어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본당에 모여서 제물을 나누어 먹는다. 제물로 올린 돼지뼈나 쇠뼈는 개가 먹지 못하도록 땅에 묻는다. 이는 신령이 운감한 제물이기 때문에 깨끗이 처리하려는 것이다. 한편 떡과 돼지고기는 양이 많기 때문에 집집에 조금씩 나누어 준다. 쇠머리는 이튿날인 열엿샛날 점심 때 국을 끓여서 나누어 먹는다. 이날을 ‘학개닦는날’이라고 한다. 일종의 [뒤풀이](/topic/뒤풀이)이다. 쇠족은 제사를 지내느라 수고한 고양주, 제관, 축관, 이장 등에게 나누어 준다.

![마을신앙 제천오티별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5515_t_.jpg)
참고문헌제천시 오티별신제 (이창식, 제천문화원, 2001)
오티별신제의 성격 (최명환, 제천 오티별신제의 성격과 특징, 충북문화재연구원 학술세미나, 2010)
오티별신제의 절차와 내용 (남향, 제천 오티별신제의 성격과 특징, 충북문화재연구원 학술세미나, 2010)
신구문화사제주도무속자료사전현용준1980
민속원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진성기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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