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사길령산령각계문서

한국무속신앙사전
19세기 후반부터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내에 게판(揭板)된 17개의 중수(重修) 및 신입기(新入記)를 적은 [현판](/topic/현판)과 산령각계 계원 및 산령각제를 주관한 계수ㆍ유사 등과 함께 고사하기(告祀下記) 등을 작성한 문건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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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부터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내에 게판(揭板)된 17개의 중수(重修) 및 신입기(新入記)를 적은 [현판](/topic/현판)과 산령각계 계원 및 산령각제를 주관한 계수ㆍ유사 등과 함께 고사하기(告祀下記) 등을 작성한 문건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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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정의19세기 후반부터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내에 게판(揭板)된 17개의 중수(重修) 및 신입기(新入記)를 적은 [현판](/topic/현판)과 산령각계 계원 및 산령각제를 주관한 계수ㆍ유사 등과 함께 고사하기(告祀下記) 등을 작성한 문건 일체.
정의19세기 후반부터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내에 게판(揭板)된 17개의 중수(重修) 및 신입기(新入記)를 적은 [현판](/topic/현판)과 산령각계 계원 및 산령각제를 주관한 계수ㆍ유사 등과 함께 고사하기(告祀下記) 등을 작성한 문건 일체.
참조[태백산사길령산령각제](/topic/태백산사길령산령각제)
참고문헌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 (1870)
四吉嶺契中家垈文券 (1881)
山靈閣重修時扶助列名錄 (1888)
上元戊子四月十五日太白山山靈閣重建扶助記 (1888)
太白山靈閣稧員名錄 (1892)
太白山靈閣稧員各錄 (1898)
千金錄 (1908~)
己酉四月十五日 各有司錄 (1909)
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時寄附列名記 (1920)
大正九年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記 (1920)
辛酉年四月十五日靈閣修理記念 (1921)
自辛酉四月十五日士吉嶺告祀時所用下記 (1921)
甲子四月十五日新入記 (1924)
四吉嶺新入稧金出入帳 (1926)
己巳四月十五日新入記 (1929)
乙亥四月十五日 (1935)
壬午四月十五日 이후 문건 (1941~)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 연구 (신종원․노남호, 강원문화사연구 3,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8)
千金錄 (2005~)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문건 조사 연구 (김강산, 장시와 교통체계, 민속원, 2008)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topic/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울진 12령 샛재[鳥嶺] 성황사와 보부상단 (김도현, 실천민속학연구 16, 실천민속학회, 2010)
신입회원 下記 (~庚辰年 4월 15일까지)
참조[태백산사길령산령각제](/topic/태백산사길령산령각제)
참고문헌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 (1870)
四吉嶺契中家垈文券 (1881)
山靈閣重修時扶助列名錄 (1888)
上元戊子四月十五日太白山山靈閣重建扶助記 (1888)
太白山靈閣稧員名錄 (1892)
太白山靈閣稧員各錄 (1898)
千金錄 (1908~)
己酉四月十五日 各有司錄 (1909)
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時寄附列名記 (1920)
大正九年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記 (1920)
辛酉年四月十五日靈閣修理記念 (1921)
自辛酉四月十五日士吉嶺告祀時所用下記 (1921)
甲子四月十五日新入記 (1924)
四吉嶺新入稧金出入帳 (1926)
己巳四月十五日新入記 (1929)
乙亥四月十五日 (1935)
壬午四月十五日 이후 문건 (1941~)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제 연구 (신종원․노남호, 강원문화사연구 3,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8)
千金錄 (2005~)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문건 조사 연구 (김강산, 장시와 교통체계, 민속원, 2008)
강원도 영동 남부지역 고을 및 [마을](/topic/마을)신앙 (김도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울진 12령 샛재[鳥嶺] 성황사와 보부상단 (김도현, 실천민속학연구 16, 실천민속학회, 2010)
신입회원 下記 (~庚辰年 4월 15일까지)
내용사길령 산령각 내 [현판](/topic/현판)과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들을 통해 계원들의 규약과 간부, 제의를 준비하기 위해 임명된 사람들과 신입회원, 공동기금을 빌려 주어 이식한 사례 등을 알 수 있다. 문서에 나타난 특징적인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종 기록을 통해 제의를 주관한 계수, 공원, 도유사, 별유사 등의 직책을 매년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시기는 항상 산령각제를 마친 후 다음 해 담당자를 뽑아 임명하였는데, 이는 이들 조직이 삼척과 봉화의 장시를 관장하기보다는 산령각제 운영을 통한 결속을 다지는 것을 중시한 조직이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사길령 산령각에서 [고사](/topic/고사)(告祀)를 지낼 때 준비한 각종 제수(祭需) 비용을 적은 것이 「고사하기(告祀下記)」이다. 경인년(1890)에 작성한 「고사하기」를 보면 [제물](/topic/제물)로 쓸 소 한 마리 값이 29냥 5전 등 총 55냥 6전 7푼의 경비로 제수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문건을 통해 당시의 제사 규모와 제수의 종류를 대강 알 수 있고, 또한 당시 물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어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셋째, 사길령 산령각계에는 보유 자금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등 자본 증식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계원이 아닌 사람도 돈을 빌릴 수 있었으며, 조직을 이끌었던 계수(稧首)도 돈을 빌려 쓴 기록이 보인다. 구체적으로 유급기(流給記)를 보면 1년 동안 급채(給債)해 준 것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돈을 빌려 주어 점점 기금을 늘려 나가는 과정을 해마다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계수와 임원들이 수결을 하여 확인하고 인계인수하면 이듬해 임원들이 그 돈을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유한 토지가 점차 늘어 20,000여㎡에 이르고 있는데 이미 100여 년 전에 구입한 땅이라고 한다. 문건 속에는 도조(賭租)를 준 기록이 많고 지금도 소유한 땅을 [배추](/topic/배추)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도지를 주고 있다. 신유년(1921)에 도지를 준 기록에 의하면 각처에 토지가 있어 연간 140냥이 넘는 도조를 거두어들이고 이자수입 50여 냥도 함께 받은 것으로 보아 재정 기반이 매우 건실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풍부한 재정 기반을 바탕으로 삼밭을 비롯한 여러 곳의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소작](/topic/소작)인의 가옥을 새로이 건립하여 주기도 하였음이 각종 기록에 나타나 있다.

다섯째, 사길령 산령각계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여성이 유사(有司)나 공원(公員) 등의 직책에 임명되어 산령각계 운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사길령 산령각계 문서 가운데 「계원열명좌록(稧員列名座錄)」에 최명숙(崔明淑), 김진옥(金振玉), 이치옥(李致玉), 김주옥(金珠玉) 등의 이름이 보이고 그 밖의 문서에도 안화숙(安和淑), 박문숙(朴文淑), 손숙이(孫淑伊), 이화지(李花枝) 등 여성의 이름이 등장한다. 울진 12령 샛재 성황사 내에는 일제강점기 이후 여성들이 상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수 현판이 성황사 내에 걸려 있다. 이것으로 보아 보부상단이 해체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각지에서 여성들의 행상단 참여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여섯째, 「태백산령각계원각록(太白山靈閣稧員各錄)」에 보면 경자년(1900)에 박성화(朴聖化)가 산령각(山靈閣)에 화상(畫像)을 제작할 때 5냥을 부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예전에 산령각에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일곱째, 산령각계를 운영하면서 ‘반수(班首)’와 ‘상민(商民)’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보부상단이 해체되기 전에 전국 각 지역 장시를 배경으로 성장한 보부상단의 조직과 관련한 명칭인데,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부상단이 해체된 이후에도 이와 같은 명칭을 사용한 것은 보부상단이 주도하여 운영한 전통을 잘 계승하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이와 같은 명칭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용사길령 산령각 내 [현판](/topic/현판)과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들을 통해 계원들의 규약과 간부, 제의를 준비하기 위해 임명된 사람들과 신입회원, 공동기금을 빌려 주어 이식한 사례 등을 알 수 있다. 문서에 나타난 특징적인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각종 기록을 통해 제의를 주관한 계수, 공원, 도유사, 별유사 등의 직책을 매년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시기는 항상 산령각제를 마친 후 다음 해 담당자를 뽑아 임명하였는데, 이는 이들 조직이 삼척과 봉화의 장시를 관장하기보다는 산령각제 운영을 통한 결속을 다지는 것을 중시한 조직이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사길령 산령각에서 [고사](/topic/고사)(告祀)를 지낼 때 준비한 각종 제수(祭需) 비용을 적은 것이 「고사하기(告祀下記)」이다. 경인년(1890)에 작성한 「고사하기」를 보면 [제물](/topic/제물)로 쓸 소 한 마리 값이 29냥 5전 등 총 55냥 6전 7푼의 경비로 제수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문건을 통해 당시의 제사 규모와 제수의 종류를 대강 알 수 있고, 또한 당시 물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어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셋째, 사길령 산령각계에는 보유 자금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등 자본 증식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계원이 아닌 사람도 돈을 빌릴 수 있었으며, 조직을 이끌었던 계수(稧首)도 돈을 빌려 쓴 기록이 보인다. 구체적으로 유급기(流給記)를 보면 1년 동안 급채(給債)해 준 것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돈을 빌려 주어 점점 기금을 늘려 나가는 과정을 해마다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계수와 임원들이 수결을 하여 확인하고 인계인수하면 이듬해 임원들이 그 돈을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유한 토지가 점차 늘어 20,000여㎡에 이르고 있는데 이미 100여 년 전에 구입한 땅이라고 한다. 문건 속에는 도조(賭租)를 준 기록이 많고 지금도 소유한 땅을 [배추](/topic/배추)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도지를 주고 있다. 신유년(1921)에 도지를 준 기록에 의하면 각처에 토지가 있어 연간 140냥이 넘는 도조를 거두어들이고 이자수입 50여 냥도 함께 받은 것으로 보아 재정 기반이 매우 건실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풍부한 재정 기반을 바탕으로 삼밭을 비롯한 여러 곳의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소작](/topic/소작)인의 가옥을 새로이 건립하여 주기도 하였음이 각종 기록에 나타나 있다.

다섯째, 사길령 산령각계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여성이 유사(有司)나 공원(公員) 등의 직책에 임명되어 산령각계 운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사길령 산령각계 문서 가운데 「계원열명좌록(稧員列名座錄)」에 최명숙(崔明淑), 김진옥(金振玉), 이치옥(李致玉), 김주옥(金珠玉) 등의 이름이 보이고 그 밖의 문서에도 안화숙(安和淑), 박문숙(朴文淑), 손숙이(孫淑伊), 이화지(李花枝) 등 여성의 이름이 등장한다. 울진 12령 샛재 성황사 내에는 일제강점기 이후 여성들이 상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수 현판이 성황사 내에 걸려 있다. 이것으로 보아 보부상단이 해체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각지에서 여성들의 행상단 참여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여섯째, 「태백산령각계원각록(太白山靈閣稧員各錄)」에 보면 경자년(1900)에 박성화(朴聖化)가 산령각(山靈閣)에 화상(畫像)을 제작할 때 5냥을 부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예전에 산령각에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일곱째, 산령각계를 운영하면서 ‘반수(班首)’와 ‘상민(商民)’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보부상단이 해체되기 전에 전국 각 지역 장시를 배경으로 성장한 보부상단의 조직과 관련한 명칭인데,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부상단이 해체된 이후에도 이와 같은 명칭을 사용한 것은 보부상단이 주도하여 운영한 전통을 잘 계승하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이와 같은 명칭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태백산 사길령을 오가며 장사하였던 보부상들이 영로(嶺路)의 안전과 장사의 번성을 위해 산령각을 세우고 매년 음력 4월 15일 제사를 지냈다. 이후 보부상이 해체되고 이들에 의한 상품 교류가 축소되었어도 태백시 혈리에 사는 주민들이 산령각계라는 이름으로 보부상들이 남긴 재산을 관리하고 산령각제를 매년 지내고 있다.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내에 있는 중수 [현판](/topic/현판)과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중심으로 산령각계(山靈閣契)와 당고사(堂告祀) 운영에 대한 연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산령각 중수와 관련한 연혁을 중수 현판을 분석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현판은 1888년에 작성한 「상원무자사월십오일태백산산령각중건부조기(上元戊子四月十五日太白山山靈閣重建扶助記)」인데, 삼척을 비롯하여 경상도 봉화, 안동, 황해도 해주, 평안도 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온 보부상들이 중수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축년(1913)에 계수(稧首) 박영수(朴永秀) 외 4명의 계수와 그 외 4명을 합쳐 9명이 만들어 게판(揭板)한 현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산령각이 행로의 안전 등을 위해 중요함을 적었다.

경신년(1920)에 중수하였음은 「경신사월십오일사길령령각중수시기부열명기(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時寄附列名記)」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때 계수와 유사가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고, 계수를 포함하여 계원 169명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1920년에 박영수(朴永秀), 민영규(閔永奎), 김덕률(金德律) 3명이 중수에 관여하였음을 밝힌 「대정구년경신사월십오일사길령령각중수기(大正九年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1920년 중수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해 뒤인 신유년(1921)에 1920년에 산령각을 중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신유년사월십오일령각수리기념(辛酉年四月十五日靈閣修理記念)」이란 제목의 현판을 걸었는데, 현판에 기재된 내용을 통해 계수와 계원들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때 산령각을 ‘영각(靈閣)’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제당은 1999년 9월 20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때 중수를 주도한 직책은 반수․계수․유사였음을 게판(揭板)된 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수 현판과 함께 1923년, 1924년, 1929년, 1935년 4월 15일에 신입 회원들을 영입한 것을 기념한 현판인 「계해사월십오일신입기(癸亥四月十五日新入記)」, 「갑자사월십오일신입기(甲子四月十五日新入記)」, 「기사사월십오일신입기(己巳四月十五日新入記)」, 「을해사월십오일(乙亥四月十五日)」이 걸려 있어 당시 회원으로 가입한 명단을 알 수 있다. 이 현판을 통해 당시 신입회원을 받아들인 계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으며, 신입 회원들은 입회비로 5냥(兩)을 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각종 현판과 함께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통해 사길령 산령각계의 운영에 대한 연혁을 알 수 있다. 먼저 경오년(1870)에 작성된 「태백산산령각수계계안성첩(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에는 당시 만든 규약과 제의를 주도한 직책과 명단, 제문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870년대에 사길령 산령각제를 운영하기 위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었고, 이때 만들어진 제의 관련 직책은 계수, 공원, 유사(유사, 도유사, 별유사)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 제의 담당 직책과 규약이 지금까지 잘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자년(1768)에 만든 「산령각중수시부조열명록(山靈閣重修時扶助列名錄)」을 비롯하여 1892년에 작성한 「태백산령각계원명록(太白山靈閣稧員名錄)」, 1898년부터 작성한 「태백산령각계원각록(太白山靈閣稧員各錄)」, 1909년부터 신입계원을 중심으로 작성된 「신입기」 등을 분석한 결과 1969년까지 사길령이 연결된 삼척과 봉화 이외의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사길령 산령각계 운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신년(1908)에 만들어 기유년(1909)에 가입한 명단을 적기 시작한 『천금록(千金錄)』에는 고사(告祀)에 참가한 계원들의 거주지에 대한 기록을 기유년(1969)까지 적었다. 이후의 기록에는 계원들의 거주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지역 주민 위주로 산령각계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서에 찍은 도장이 1921년부터 ‘사길령상민계수지인(四吉嶺商民契首之印)’이라 새겨진 도장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공식 명칭이 ‘사길령상민계(四吉嶺商民契)’였으며, 사길령을 오가던 상인 집단이 계속 사길령 산령각제 운영에 직접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금록』에는 매년 음력 4월 15일 당고사를 치렀던 조직과 계원의 성명, 갹출한 금액, 거주 지역 등을 기록하였다. 이를 가로ㆍ세로 각 2㎝ 정방형의 ‘사길령상민계수지인(四吉嶺商民契首之印)’으로 확인하였다. 이 도장으로 확인한 것은 경오년(1990)까지이다. 지금은 ‘태백시혈동새[마을](/topic/마을)회인’이라 새긴 도장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길령을 오가던 상인들의 활동이 쇠퇴함에 따라 사길령 산령각계는 사길령 아래에 있는 태백시 혈동 주민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5년부터 새롭게 작성한 『천금록』에 의하면 계수, 계장, 유사(12명), 별유사(2명) 외에 신입회원 18명을 적었는데, 그중에는 각종 법인과 태백시의회 차원에서도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길령 산령각계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역사태백산 사길령을 오가며 장사하였던 보부상들이 영로(嶺路)의 안전과 장사의 번성을 위해 산령각을 세우고 매년 음력 4월 15일 제사를 지냈다. 이후 보부상이 해체되고 이들에 의한 상품 교류가 축소되었어도 태백시 혈리에 사는 주민들이 산령각계라는 이름으로 보부상들이 남긴 재산을 관리하고 산령각제를 매년 지내고 있다.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 내에 있는 중수 [현판](/topic/현판)과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중심으로 산령각계(山靈閣契)와 당고사(堂告祀) 운영에 대한 연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산령각 중수와 관련한 연혁을 중수 현판을 분석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현판은 1888년에 작성한 「상원무자사월십오일태백산산령각중건부조기(上元戊子四月十五日太白山山靈閣重建扶助記)」인데, 삼척을 비롯하여 경상도 봉화, 안동, 황해도 해주, 평안도 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온 보부상들이 중수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축년(1913)에 계수(稧首) 박영수(朴永秀) 외 4명의 계수와 그 외 4명을 합쳐 9명이 만들어 게판(揭板)한 현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산령각이 행로의 안전 등을 위해 중요함을 적었다.

경신년(1920)에 중수하였음은 「경신사월십오일사길령령각중수시기부열명기(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時寄附列名記)」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때 계수와 유사가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고, 계수를 포함하여 계원 169명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1920년에 박영수(朴永秀), 민영규(閔永奎), 김덕률(金德律) 3명이 중수에 관여하였음을 밝힌 「대정구년경신사월십오일사길령령각중수기(大正九年庚申四月十五日四吉嶺靈閣重修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1920년 중수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해 뒤인 신유년(1921)에 1920년에 산령각을 중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신유년사월십오일령각수리기념(辛酉年四月十五日靈閣修理記念)」이란 제목의 현판을 걸었는데, 현판에 기재된 내용을 통해 계수와 계원들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때 산령각을 ‘영각(靈閣)’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제당은 1999년 9월 20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때 중수를 주도한 직책은 반수․계수․유사였음을 게판(揭板)된 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수 현판과 함께 1923년, 1924년, 1929년, 1935년 4월 15일에 신입 회원들을 영입한 것을 기념한 현판인 「계해사월십오일신입기(癸亥四月十五日新入記)」, 「갑자사월십오일신입기(甲子四月十五日新入記)」, 「기사사월십오일신입기(己巳四月十五日新入記)」, 「을해사월십오일(乙亥四月十五日)」이 걸려 있어 당시 회원으로 가입한 명단을 알 수 있다. 이 현판을 통해 당시 신입회원을 받아들인 계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으며, 신입 회원들은 입회비로 5냥(兩)을 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각종 현판과 함께 사길령 산령각계에서 보관 중인 문서를 통해 사길령 산령각계의 운영에 대한 연혁을 알 수 있다. 먼저 경오년(1870)에 작성된 「태백산산령각수계계안성첩(太白山山靈閣修稧稧案成帖)」에는 당시 만든 규약과 제의를 주도한 직책과 명단, 제문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870년대에 사길령 산령각제를 운영하기 위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었고, 이때 만들어진 제의 관련 직책은 계수, 공원, 유사(유사, 도유사, 별유사)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 제의 담당 직책과 규약이 지금까지 잘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자년(1768)에 만든 「산령각중수시부조열명록(山靈閣重修時扶助列名錄)」을 비롯하여 1892년에 작성한 「태백산령각계원명록(太白山靈閣稧員名錄)」, 1898년부터 작성한 「태백산령각계원각록(太白山靈閣稧員各錄)」, 1909년부터 신입계원을 중심으로 작성된 「신입기」 등을 분석한 결과 1969년까지 사길령이 연결된 삼척과 봉화 이외의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사길령 산령각계 운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신년(1908)에 만들어 기유년(1909)에 가입한 명단을 적기 시작한 『천금록(千金錄)』에는 고사(告祀)에 참가한 계원들의 거주지에 대한 기록을 기유년(1969)까지 적었다. 이후의 기록에는 계원들의 거주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지역 주민 위주로 산령각계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서에 찍은 도장이 1921년부터 ‘사길령상민계수지인(四吉嶺商民契首之印)’이라 새겨진 도장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공식 명칭이 ‘사길령상민계(四吉嶺商民契)’였으며, 사길령을 오가던 상인 집단이 계속 사길령 산령각제 운영에 직접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금록』에는 매년 음력 4월 15일 당고사를 치렀던 조직과 계원의 성명, 갹출한 금액, 거주 지역 등을 기록하였다. 이를 가로ㆍ세로 각 2㎝ 정방형의 ‘사길령상민계수지인(四吉嶺商民契首之印)’으로 확인하였다. 이 도장으로 확인한 것은 경오년(1990)까지이다. 지금은 ‘태백시혈동새[마을](/topic/마을)회인’이라 새긴 도장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길령을 오가던 상인들의 활동이 쇠퇴함에 따라 사길령 산령각계는 사길령 아래에 있는 태백시 혈동 주민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5년부터 새롭게 작성한 『천금록』에 의하면 계수, 계장, 유사(12명), 별유사(2명) 외에 신입회원 18명을 적었는데, 그중에는 각종 법인과 태백시의회 차원에서도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길령 산령각계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의의대부분의 고갯마루에 있는 국시나 제당에는 이곳을 지나는 행상들이 안전과 상업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개인적인 치성을 드리는 예가 대부분이다. 예외적으로 울진과 봉화의 장시를 관장하였던 보부상단의 공식적인 조직에서 울진 12령 샛재 성황사 운영과 제의를 주도하였던 사례도 있다. 사길령 산령각에서는 울진 12령 샛재 성황사 운영과는 달리 산령각제를 지낼 것을 목적으로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계를 만들어 기금을 조성하고, 지속적으로 신입 회원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산령각의 중수와 운영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보부상단이 해체되었어도 사길령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던 행상들이 사길령 산령각제 운영에 계원으로 지속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사길령을 통한 교역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어도 혈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topic/마을) 주민들에 의해 기금이 조성되고 지속적으로 신입 회원을 받아들여 산령각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지역 사례에 비추어 매우 큰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사길령 산령각계 문서이다.

그리고 문서에 나타난 계원들의 출신지가 전국 각지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태백산 사길령이 전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들의 주요 교통로였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의의대부분의 고갯마루에 있는 국시나 제당에는 이곳을 지나는 행상들이 안전과 상업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개인적인 치성을 드리는 예가 대부분이다. 예외적으로 울진과 봉화의 장시를 관장하였던 보부상단의 공식적인 조직에서 울진 12령 샛재 성황사 운영과 제의를 주도하였던 사례도 있다. 사길령 산령각에서는 울진 12령 샛재 성황사 운영과는 달리 산령각제를 지낼 것을 목적으로 태백산 사길령 산령각계를 만들어 기금을 조성하고, 지속적으로 신입 회원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산령각의 중수와 운영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보부상단이 해체되었어도 사길령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던 행상들이 사길령 산령각제 운영에 계원으로 지속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사길령을 통한 교역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어도 혈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topic/마을) 주민들에 의해 기금이 조성되고 지속적으로 신입 회원을 받아들여 산령각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지역 사례에 비추어 매우 큰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사길령 산령각계 문서이다.

그리고 문서에 나타난 계원들의 출신지가 전국 각지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태백산 사길령이 전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들의 주요 교통로였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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